"참배 중지, 그게 나의 마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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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 히로히토(裕仁.1901~89) 쇼와(昭和) 일왕은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合祀)된 것을 크게 못마땅해 했으며, 합사를 계기로 참배 중단을 결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88년 도미다 도모히코(富田朝彦) 당시 궁내청 장관(고인)이 일왕의 발언을 직접 기록한 메모에서 확인됐다. 일왕의 야스쿠니 참배 중단 이유가 문서로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이에 따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를 비롯, 전몰자 추모를 내세워 참배를 정당화하고 있는 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에 큰 영향을 줄 전망이라고 일 언론들이 20일 일제히 보도했다.

메모가 공개된 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는) 마음의 문제이며 강제받는 것이 아니다"는 반응을 보였다. 임기 중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가도 좋고 안 가도 좋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A급 전범의 분사론에 대해 "일개 종교법인에 대해 정부가 이래라저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논의는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 참배 중지, "그게 나의 마음이다"=도미다 전 장관은 히로히토 일왕과 주고받은 대화를 일기와 수첩에 자세히 기록해 남겼다. 그는 궁내청 차장 시절을 포함해 75~86년 일기 각 1권, 86~97년분 수첩 20여 권을 남겼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입수해 20일 보도한 도미다 전 장관의 88년 4월 28일치 메모에 따르면 히로히토 일왕은 A급 전범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표명하고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고 말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야스쿠니를 8번 참배했으나 A급 전범이 합사(78년 10월)된 뒤로는 한 차례도 참배하지 않았다. 히로히토의 아들인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도 89년 즉위 이래 한 번도 참배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히로히토 일왕의 참배 중단 이유로는 ▶A급 전범 합사▶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전 총리의 참배가 공인 자격인지, 사인 자격인지를 놓고 정치문제화됐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 분석이 제기돼 왔으나 어느 쪽도 뚜렷한 확증이 없었다. 같은 날 메모에는 히로히토 일왕이 자신의 생일(4월 29일)을 앞두고 한 기자회견에서 전쟁에 대한 감회를 질문받고 "가장 싫은 기억"이라고 말한 배경에 대해서도 적혀 있다. 이 메모에는 그가 "전쟁에 대한 감상을 질문받고는 나쁜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일본 정치권 강타=20일 조간에 보도된 히로히토 일왕의 메모는 일본 정치권에 큰 파문을 가져왔다. 일 언론들은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북한 미사일 등 안보 문제를 제치고 9월 20일의 자민당 총재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솟아오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당장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인 다음달 15일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할 것인가를 두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궁내청으로부터 '개인의 메모에 근거한 것으로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일 언론들은 "이번 메모 공개를 계기로 A급 전범 분사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이 '굳히기'에 들어간 아베 장관에게 도전장을 던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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