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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면 동맹도 없다'···쿠르드족 울린 트럼프의 배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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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3월 IS 격퇴를 선언하면서 2016년(아래)와 현재 IS 세력권을 표시한 지도를 기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3월 IS 격퇴를 선언하면서 2016년(아래)와 현재 IS 세력권을 표시한 지도를 기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AP=연합뉴스]

“저게 선거일(2016년 대선) 당시 IS, 이게 현재의 IS다. IS 거점 지역은 없다.”

지난 3월 2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지도를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세력권이 표시된 이라크와 시리아 일대 지도였다. 2016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하지 못한 IS 격퇴를 자신이 해냈다는 자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IS의 완전 격퇴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쿠르드족이 중심이 된 민병대 시리아민주군(SDF)의 공로를 크게 치하했다. 그는 “SDF 등 국제공조 파트너와 함께 IS 점령지역을 모두 해방시켰음을 발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터키의 쿠르드 민병대 공격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올린 옹호 트윗. [트위터 캡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터키의 쿠르드 민병대 공격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올린 옹호 트윗. [트위터 캡처]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IS 격퇴 선언을 한 지 6개월 뒤인 지난 7일(현지시간)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쿠르드족은 우리와 같이 싸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엄청난 돈과 장비가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이 쿠르드족을 공격하려는 터키를 수년 동안 막아줬다”며 “이제 말도 안 되는 전쟁에서 벗어나 우리 군인들을 집으로 데려올 때”라고 말했다. 시리아 주둔 미군을 철군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SDF는 “미군이 의무를 저버리고 터키 침공의 길을 열어줬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터키 쿠르드족 공격 안 막겠다" #IS 격퇴 공신 쿠르드족 '배신감' 커져 #공화당 원내대표·트럼프 측근까지 혹평 #국방부 긴급 해명…트럼프도 진화 나서

IS 격퇴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미국의 동맹 쿠르드족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 처지가 됐다. 독립국가 건설의 꿈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고, 당장 터키의 침공을 걱정해야 한다. 경제적 이해득실 앞에선 동맹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트럼프식 '계산서 외교'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오른쪽)과 지난 6일 전화통화를 한 뒤 시리아 주둔 미군의 철군 의사를 밝혔다.[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오른쪽)과 지난 6일 전화통화를 한 뒤 시리아 주둔 미군의 철군 의사를 밝혔다.[AP =연합뉴스]

발단은 트럼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한 지난 6일이다. 통화 이후 백악관은 “터키가 오래 준비한 시리아 북부 군사작전을 곧 추진할 것이다. 미군은 그 작전에 지원도 개입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리아 북부는 SDF를 비롯한 쿠르드족의 근거지다. 터키의 쿠르드족 공격에 대해 미국이 동의 또는 묵인하겠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7일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할 것”이란 트윗을 올리며 기정사실화됐다.

터키에 SDF를 비롯한 시리아 쿠르드 병력은 눈엣가시다. 시리아 북부에 근거한 이들이 자국 내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 ‘쿠르드노동자당’(PKK)과 함께 분리독립 운동을 벌일 것을 우려해서다. 이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군대를 시리아 국경에 보내 쿠르드족 병력을 터키 영토에서 멀리 몰아내는 작전을 준비해왔다.

쿠르드족이 장악한 시리아 북동부에 전운이 짙어지고 있다. 터키의 군사작전이 초읽기에 돌입한 때문이다. 미국 백악관은 6일(현지시간) "터키가 오래 준비한 시리아 북부 군사작전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쿠르드족이 장악한 시리아 북동부에 전운이 짙어지고 있다. 터키의 군사작전이 초읽기에 돌입한 때문이다. 미국 백악관은 6일(현지시간) "터키가 오래 준비한 시리아 북부 군사작전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그동안은 시리아 북부에 주둔한 미군이 ‘안전지대’를 설정해 놓고 터키군과 쿠르드족의 충돌을 막았다. 쿠르드족 입장에선 미군이 터키의 공격을 막는 인계철선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철수론’을 꺼내며 터키의 시리아 북부 진공을 막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 CNN은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시리아 쿠르드족 군대는 고스란히 터키군 수중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쿠르드족은 IS 격퇴전에서 미국의 든든한 동맹이었다. SDF는 지난 2016년 IS가 점령한 시리아 북부 만비즈를 탈환하며 불리했던 전황을 반전시켰다. 이듬해 IS 본거지 락까 점령도 SDF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쿠르드족은 독립국가 건설을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기대하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뉴욕타임스(NYT)는 “터키군이 시리아 북부로 밀고 들어올 것이라는 전망은 쿠르드족에게 수년간 전쟁터에서 협력했던 미군에 배신당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했다.

지난달 21일 시리아 북부 탈 아브야드 지구에서 쿠르드 민병대 SDF 소속 병사가 SDF 깃발을 들어올리고 있다. 이를 미군이 바라보고 있다.[EPA=연합뉴스]

지난달 21일 시리아 북부 탈 아브야드 지구에서 쿠르드 민병대 SDF 소속 병사가 SDF 깃발을 들어올리고 있다. 이를 미군이 바라보고 있다.[EPA=연합뉴스]

터키 침공으로 IS가 다시 암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NYT는 “SDF는 격퇴전 과정에서 생포한 IS 조직원 1만명을 구금하고 있다”며 “만일 터키가 쿠르드족을 공격할 경우 이들이 풀려날 수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트럼프는 IS가 소멸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트럼프는 터키와 시리아 그리고 유럽국들이 IS 부활을 막아줄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린지 그레이엄 상원 의원도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 방침을 비판하고 나섰다.[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린지 그레이엄 상원 의원도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철군 방침을 비판하고 나섰다.[AFP=연합뉴스]

미 정치권 반발도 거세다. 특히 트럼프가 속한 공화당 의원들이 적극적이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시리아에서의 황급한 철수는 오직 러시아와 이란, (시리아) 아사드 정권만 이롭게 할 것”이라며 “IS와 다른 테러집단이 재집결할 위험성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린지 그레이엄 상원 의원마저 비판 대열에 나섰다. 그는 “이 결정이 시리아를 혼돈으로 밀어 넣고 IS를 대담하게 하는 ‘진행 중인 재앙’”이라고 말했다.

파장이 커지자 미 국방부는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터키의 작전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도 트위터에 “미군은 언제든 돌아가 폭파할 수 있다” 며 “터키가 도를 넘는다면 터키 경제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말살시킬 것(나는 전에도 그랬다!)”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식 사고, 돈 드는 일은 하지 않아” 

그럼에도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의 군사행동에는 반대했지만, 미군의 시리아 철수 계획은 굽히지 않았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동맹이건 적이든 미국의 핵심이익이 아니면 ‘돈 드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식 사고는 굳건하다”며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협상에 나서야 할 한국도 챙겨볼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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