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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페르미를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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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논설위원

김승현 논설위원

‘갈라진 광장’의 나라에서 느닷없이 주목받은 이방인이 있다. 엔리코 페르미(1901~1954)다. 갈릴레오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과학자라는 그는 최근 서울 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인 군중 때문에 소환됐다. 그의 이름을 딴 ‘페르미 추정(Fermi estimate)’은 단위 면적에 있는 사람 수를 가정한 뒤 전체 공간에 대입해 군중의 규모를 예측한다. 덕분에 집회 초기 100만~200만명대로 부풀려진 참가자가 10만~20만명대로 ‘정상화’ 됐다.

페르미식 계산법은 창의적이고 유연한 인재를 찾는 기업의 채용에도 활용됐다. ‘시카고의 피아노 조율사 수를 계산하라’는 식의 문제를 냈다. 잔재주로 여겨진다면 페르미를 잘 모르시는 말씀이다. 로마의 동료들은 그를 ‘물리학의 교황’이라 불렀다. 같은 이름의 전기 『the pope of physics』가 2016년 미국에서 발간됐고, 지난해 한국에 『엔리코 페르미 평전』으로 번역됐다.

정량화와 이성(理性)에 기반을 둔 그의 방식은 엄청난 성과를 냈다. 느린 중성자로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음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1938년)을 받았고, 핵 반응로를 개발해 ‘핵 시대의 설계자’로 불린다. 유대인 부인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한 뒤엔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와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이 됐다. 1945년 7월 16일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실험한 날, 페르미는 벙커에서 잘게 찢은 종잇조각을 떨어뜨려 40초 뒤에 2.4m 정도 밀리는 것을 보고 폭발 강도를 추정했다고 한다.

그런 페르미를 우리는 잘 모른다. 그저 어느 ‘민첩한 학자’ 덕분에 광장에 모인 사람 수를 계산해 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이렇듯 본질에는 관심이 적으니 광장의 분열이 원자폭탄만큼 위험할 수 있다는 걱정 따윈 하지도 않는 것인지….

김승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