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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연장의 역설···정년퇴직은 줄고 되레 조기퇴직만 늘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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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0세 정년이 법제화해 2016년 정착됐지만 이후 되려 조기 퇴직으로 회사를 떠나는 사람은 늘고, 정년퇴직자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어르신들이 정규직 일자리에 더 오래 종사하실 수 있도록 정년을 늘려가겠다”고 밝혔지만,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정년을 지금보다 더 올리는 정책이 의도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7일 통계청의 ‘2019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2016년 퇴직한 55~64세 취업 경험자 가운데 권고사직이나 명예퇴직ㆍ정리해고로 일자리를 잃는 비율은 9.6%였다. 이 비율은 이듬해 11%대로 올라가더니 올해는 12.2%까지 높아졌다. 비율이 아닌 인원수로 따져봐도 같은 기간 41만4000명에서 60만2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중장년층의 고용안정을 위해 정년연장을 시행했지만, 인위적인 퇴직이 더 늘어나는 역설적인 결과가 통계로 나온 것이다.

정년퇴직은 줄고, 조기퇴직은 늘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정년퇴직은 줄고, 조기퇴직은 늘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퇴직 사유 중 비중이 가장 큰 ‘사업부진, 조업중단, 휴·폐업’도 30.6%(132만7000명)에서 33.0%(162만8000명)로 불어났다. 경기불황에 따른 장년층 실업자가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정년퇴직한 사람의 비율은 같은 기간 8.2%(35만5000명)에서 7.1%(35만명)으로 떨어졌다.

정년연장을 통해 고령화에 대응하는 나라가 적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이처럼 효과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우선 빠른 고령화 속도다. 남재량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고령시대의 고용문제와 새로운 고용시스템’ 발표문에 따르면 한국은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이 7% 이상인 ‘고령화 사회’에서 20% 이상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데 25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94년)ㆍ독일(76년)은 물론, 유례없이 짧았던 일본(35년)을 앞서는 속도다. 정년에 다다르는 인구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정년을 1~2년 늘리는 것도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을 크게 가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자료: 남재량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자료: 남재량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무엇보다 직무의 내용이나 개개인의 역량과 무관하게 근속 기간이 길수록 임금이 올라가는 연공서열형 임금체계가 걸림돌이다. 한국의 근속 30년 이상 노동자와 1년 미만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2014년 기준 4.39배로 세계 주요국 가운데 가장 컸다. 장년층 장기근속자 한명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이 청년 근로자 4명을 고용하는 데 소요되는 인건비와 맞먹는다는 의미다.

결국 장기 근속자의 비용 대비 생산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손질하지 않고 정년만 연장하면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권고사직ㆍ명예퇴직ㆍ정리해고 등의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기 퇴직이 늘고, 그 연령도 낮아지는 수순이다.

주요국 근속 30년 이상~1년 미만 근로자간 임금격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주요국 근속 30년 이상~1년 미만 근로자간 임금격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남재량 위원은 “연공서열형 임금체계가 고도성장기에는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노동 유인을 자극했지만, 저성장 고령화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며 “경직적인 임금체계에서 정년연장은 조기 퇴직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법(정년)과 현실(실제 퇴직 연령) 간 괴리는 더욱 확대되는 추세”라면서 “이런 괴리를 줄이기 위해서는 임금과 생산성 간의 격차를 줄여야 하며, 임금 유연성 제고가 현실적인 방안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뿐만 아니라 정년연장은 청년들의 취업 문을 좁혀 세대 갈등을 키운다. 강력한 노조의 보호를 받는 공공부문ㆍ대기업 근로자들에게만 효과가 집중되면서 이들의 기득권 강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비탄력적인 노동시장을 그대로 두고 정년만 연장하면 부작용만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의 입장은 문 대통령의 발언과는 다소 온도 차가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정년을 더 올리는 방안에 대해 “민간에서 논의했으면 좋겠지만 시기상조라고 해서 준비만 하고 있다”며 “정년 이후 고령자를 재취업ㆍ재고용ㆍ계속고용하는 방안을 1차적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맑혔다.

하지만 이런 방식 역시 개별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지만, 60세를 넘긴 직원을 의무적으로 계속 고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기업에 정년연장의 부담을 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6월 처음 정년연장을 논의의 장으로 올렸을 당시 제기된 여러 우려에 대한 구체적인 보완책은 마련하지 않고 추진하는 것에 대해 “20대보다 인구가 많은 50대 표심을 잡기 위한 총선용 꼼수”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 사회의 인구구조 변화를 감안할 때 정년연장이라는 큰 틀의 방향은 맞다. 고령화 시대 노동력 감소에 대비하고 숙련된 인력을 계속 활용하는 긍정적 효과도 크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연공성이 강한 임금 체계를 개편하고, 임금체계를 직무 중심으로 전환하는 한편, 근로자들이 노동시장에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재취업과 이직을 활성화하는 등의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년연장은 반드시 논의해야 할 사안이지만, 지금처럼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다”라며 “40대 말~50대 초에 은퇴하는 지금의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 경제의 중심축인 40~50대의 재고용과 창업 지원에 정책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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