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펑더화이 “역시 38군, 량싱추는 호랑이가 맞다” 승전 치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5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6>

격추한 미군기 잔해로 만든 수저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펑더화이(왼쪽 첫째). 1953년 봄 개성. [사진 김명호]

격추한 미군기 잔해로 만든 수저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펑더화이(왼쪽 첫째). 1953년 봄 개성. [사진 김명호]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70주년이 다가오자 황지광(黃繼光·황계광)과 만세군(38군)이 회자됐다. 황지광은 그렇다 치더라도 38군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의 성격과 무관치 않다. 펑더화이는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급하고, 희로애락이 분명했다. 아니다 싶으면, 상대가 누구건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부하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눈치 보기 급급했다. 좋은 점도 있었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고, 아랫사람 공을 가로채는 너절한 짓은 안 했다. 장정이나 항일전쟁, 국공전쟁 때는 물론이고, 항미원조 지원군 총사령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1차 공세에서 허탕 친 량싱추 #펑더화이 질책에 토하기까지 #2차 공세에선 대승 거둬 만회 #마오쩌둥, 아낌없는 찬사 보내 #기관총 몸으로 막은 황지광 #모친 덩팡즈는 전인대 대표 지내

참전 초기, 지원군 총사령부(總部·총부)는 직할부대가 없었다. 덩화(鄧華·등화), 한센추(韓先超·한선초), 홍쉐즈(洪學智·홍학지) 등 고급 지휘관이 즐비한 13병단을 직속으로 편성했다. 13병단은 선봉부대였다. 전신(戰神)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던 제4야전군 중 최정예였다. 펑더화이는 병단사령관 덩화를 총부제1부사령관에, 한센추와 홍쉐즈를 2, 3부사령관에 임명했다.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문제가 달라졌다. 한발 늦게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 도하한 천껑(陳賡·진갱)이나 쑹스룬(宋時輪·송시륜)의 전공과 경력은 덩화를 압도했다. 덩화는 린뱌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명참모였다. 펑더화이와 린뱌오는 내색은 안 했지만, 서로 우습게 보는 묘한 사이였다. 펑더화이는 시간이 갈수록 덩화를 신임했다. 13병단은 예하에 38, 39, 40, 42, 50, 66 등 6개 군이 있었다. 총 25만 명이었다. 총부 직속이다 보니 펑더화이는 신경을 썼다. 1차 공세에서 우신취안(吳新泉·오신천)이 지휘하는 39군이 승리하자 흡족했다. 38군에게는 불만이 많았다.

성격 급하고 희로애락 분명한 펑더화이

1952년 10월, 군장들과 함께 신임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오른쪽 셋째)와 회의를 마친 량싱추(왼쪽 둘째). [사진 김명호]

1952년 10월, 군장들과 함께 신임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오른쪽 셋째)와 회의를 마친 량싱추(왼쪽 둘째). [사진 김명호]

1950년 11월 13일 펑더화이가 지원군 당 위원회를 소집했다. 2차 공세를 앞둔 중요한 회의였다. 해 질 무렵, 미군이 버리고 간 작은 지프들이 대유동 지원군 총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펑더화이의 비서였던 양펑안(楊鳳安·양봉안)은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그날을 잊지 못했다. 생동감 넘치는 구술을 남겼다. “각 군의 군장과 정치위원들이 집결하자 총부는 활기가 넘쳤다. 압록강 도하 후 20여 일간 초연 속에서 고전 치른 일선 지휘관들의 첫 번째 모임이었다. 저녁 먹고 총사령관의 집무실로 향하는 모습이 엄숙했다. 걸음 옮길 때마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펑더화이는 군장들에게 1차 공세의 득실을 설명했다. 비판도 빠뜨리지 않았다. “작전 경험이 전무한 부대도 있었다. 명령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다”며 좌중을 둘러봤다. 얼굴에 노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더니,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38군 량싱추(梁興初·양흥초)! 어떤 놈이야?”

량싱추가 벌떡 일어섰다. 사색이 된 채 땀까지 뻘뻘 흘렸다. 펑더화이의 질책이 시작됐다. “나는 네가 호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호랑이는 무슨 놈의 호랑이냐. 쥐새끼만도 못한 놈이다. 고양이가 물어가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펑더화이는 화내기 시작하면 점점 정도가 심해지는 성격이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량싱추가 한마디 하려 하자 말대답질한다고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벽에 집어 던지며 독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나 펑더화이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다.”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량싱추는 고개를 숙였다. “제 목을 치시기 바랍니다.” 펑더화이는 서서히 자리에 앉았다. 덩화와 총정치부 주임 두핑(杜平·두평)이 겨우 펑더화이를 진정시켰다. 밖으로 나온 량싱추는 어찌나 놀랐던지 계속 토했다. 동료 군장들에게 “내 잘못이 크다”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참석자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펑더화이의 성격에 간담이 서늘했다고 한다.

펑더화이의 분노는 이유가 있었다. 지원군 측의 주장은 이렇다. “회의 16일 전인 10월 28일, 38군은 희천에 진입했다. 한국군 2개 연대의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한국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이동하고 38군은 청천강 이북에 있었다. 이때 38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파고들면 청천강 이북의 한국군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38군은 “청천강 남쪽에 막강한 미국 흑인부대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한동안 머뭇거렸다. 다음 날 황혼 무렵에야 공격을 시작했다. 한국군 8사단이 새벽에 희천을 철수한 다음이었다. 흑인부대는 흔적도 없었다.

미군 고문 등 포로, 전리품 수확 기대 이상

주더와 춤을 추는 ‘황엄마’ 덩팡즈(왼쪽). [사진 김명호]

주더와 춤을 추는 ‘황엄마’ 덩팡즈(왼쪽). [사진 김명호]

펑더화이는 2차 공세에서 량싱추에게 중책을 맡겼다. 덩화에게 귓속말을 했다. "량싱추는 맹장이다. 내게 받은 치욕을 공으로 답할 테니 두고 봐라.” 38군은 미군 2개 사단과 한국군 1개 사단에 맹공을 퍼부었다. 일곱 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2개 연대를 섬멸했다. 포로 중에 미군 고문도 있었다. 노획한 무기와 차량도 기대 이상이었다. 보고를 받은 펑더화이는 입이 벌어졌다. 덩화를 불렀다. "역시 38군이다. 량싱추는 호랑이가 맞다.” 전군에 알리겠다며 붓을 들었다. “38군은 우수한 전통을 발휘했다. 비행기와 탱크 100여 대가 포탄을 쏟아부어도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승리를 축하하며, 가상함을 전군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중국인민지원군 만세! 38군 만세!” 훗날 량싱추를 접견한 마오쩌둥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개 숙이며 “지우양, 지우양(久仰, 久仰·존함 들은 지 오랩니다) 만세군 군장”을 연발했다.

전쟁은 초기와 막판에 영웅을 배출한다. 양건스(楊根思·양근사)는 항미원조 초기,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폭탄 5㎏을 들고 미군 진지에 뛰어들었다. 황지광은 정전 담판이 한참이던 1952년 10월 20일, 상감령 전역(戰役)에서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몸으로 기관총 세례를 막았다고 한다. 수많은 영웅 중에서 이 두 사람만 특급영웅 칭호를 받았다. 특급영웅의 부모는 대우를 받았다. 황지광의 모친 덩팡즈(鄧芳芝·등방지)는 전인대 대표까지 지냈다. 다들 황엄마라고 불렀다. 마오쩌둥도 세 번 만났다. 황엄마는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와 춤 한번 추는 것이 소원이었다. 주더는 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