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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처럼 흠뻑 젖은 나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그 장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4)

'국제도서주간'이라는 이름의 글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게 무엇인가 찾아보니 유래도 목적도 불분명한 정말 일종의 놀이다. [사진 pxhere]

'국제도서주간'이라는 이름의 글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게 무엇인가 찾아보니 유래도 목적도 불분명한 정말 일종의 놀이다. [사진 pxhere]

‘국제도서주간입니다’라고 시작하는 게시물들이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다. 읽어보니 규칙이 쓰여 있다. 지금 가장 가까운 곳의 책을 집어 52페이지를 펼친 뒤 다섯 번째 문장을 베껴 포스팅할 것, 단 책의 제목은 밝히지 말 것. 그리고선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을 발췌해 두었다.

국제도서주간이 뭘까. 검색해보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의 날(World Book and Copyright Day)’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가을이 아니라 4월 23일이다. (이날은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의 사망일이기도 하면서 또 많은 유명 문인의 생일이기도 하다) 기사를 살펴보니 ‘국제도서주간’이란 유래도 목적도 불분명하며, 공식 행사가 아니라 일종의 놀이란다.

한데 이 놀이, 매력이 너무 약하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아무 책’의 ‘52페이지’의 ‘다섯 번째 문장’이라니. 이런 식으로 발췌한 문장이 누군가에게 심상을 남기는 좋은 문장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런 방식은 책 읽고 싶은 마음을 조금도 끌어올려 주지 못한다. ‘국제도서주간’이라는 놀이 이름이 무색해진다.

나는 이 놀이를 이렇게 하고 싶다. 인상 깊은 구절을 소개하되 저자와 책 이름을 밝히고 거기에 얽힌 자신의 얘기도 하나씩 곁들이는 거로 시범 삼아 해볼까. 마침 메모장에 기록해둔 문장들이 있다. 나의 마음을 뒤흔든 시의 문장들, 말하자면 시의 ‘킬링 버스(killing verse)’들이.

난 구정물의 수력발전소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3’ 부분.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에 수록.

영화 '나쁜 녀석들:더 무비'.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나쁜 녀석들:더 무비'.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최근 관람한 영화 ‘나쁜 녀석들 : 더 무비’에서 반가운 얼굴을 봤다. 마동석 앞에서 한껏 움츠러들던 삼류 깡패 말이다. 아, 저 배우 이름이 뭐였더라. 본명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데 ‘햄버거’란 이름은 대번에 떠올랐다.

배우 박효준에게 ‘햄버거’란 별명을 선사한 것은 시인 유하다. 1988년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유하는 1990년대부터 영화감독으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2)’,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그는 역시 각본과 연출을 맡은 ‘말죽거리 잔혹사(2004)’로 시나리오상을 받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넘버원 신스틸러는 김부선이라는데 이견이 없지만 그다음을 꼽자면 박효준, 즉 햄버거의 존재다. 유하는 학창시절 햄버거라고 불리던 친구를 떠올리며 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시인∙영화감독 유하는 유독 학창시절에 관한 추억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시집 『세운상가의 키드』는 거의 그런 내용이다. ‘종로3가와 청계천의 아황산 가스가 8할의 나를 키웠다’라고 말하는 시인이 세운상가에서 미국산 포르노 비디오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인생이 뭔지는 모르겠고, 와중에 성적 호기심만 넘쳐나는 10대 소년은 그로 인해 자괴감을 품기도 했다. ‘구정물의 수력발전소’란 그런 의미다.

나 역시 스스로가 구정물의 수력발전소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인간말종 같은 안하무인 거래처 앞에서 연신 굽신거리고 집에 온 날 그렇다. 이렇게 또 한 달을 보내면 월급은 나올 거다. 그걸로 대출금도 갚고 딸내미 기저귀도 사고 아내와 함께 소맥도 한 번 말아먹을 거다. 그런데 입이 영 쓰다. 전기를 만들었으되, 구정물로 그렇게 한 수력발전소도 똑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본다.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조향미, ‘온돌방’ 첫 부분. 시집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2006)』에 수록.

기억은 냄새를 불러온다. '온돌방'에 등장하는 요소들과 '할머니',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중앙포토]

기억은 냄새를 불러온다. '온돌방'에 등장하는 요소들과 '할머니',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중앙포토]

조향미의 ‘온돌방’은 시인의 옛 기억으로 시작한다. 기억은 냄새를 불러온다. 무 향내, 메주 냄새, 술독의 술 냄새…. 집안에 이런 냄새가 늘 가득하다는 것은 살림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부지런하다는 뜻이다.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와 ‘어머니’도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네들이 하는 일이란 게 전부 다 나중을 위한 것이다. 무를 말리는 것도, 메주를 담그는 것도, 술을 담그는 것도 전부 마찬가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지금 하는 일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전부 알고 계셨던 것일까.

여기까지는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그러다 제 3연을 통해 시가 된다.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간다’라는 대목에서다. 시는 ‘노릇노릇 토실토실’이라는 시어 덕분에 동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다음 연에 반전이 있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같은 시, 부분

‘장마처럼 젖은 생’이라는 반전이 알게 해준다. 이것은 아름다운 유년시절을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지독한 현실을 위로하기 위해 쓰인 시라는 것을 말이다. 식구들과 버무리며 자라난 뜨거운 온돌방, 그 덕에 시인은 단단한 정서를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장마처럼 젖은 생’도 이겨내며 산다. 할머니가 가장 신경 써서 담가놓았던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나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계셨다.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깊은 혼수상태로 말이다. 그런데 갓난아기였던 내가 병실에 등장했을 때,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셨다고 한다.

할머니의 미소가 내 온돌방이다. 조 시인의 시는 내게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시의 첫 연을 읽으면 언제든 마음이 후끈거린다.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라는 문장을 볼 때마다, 나는 잊고 있던 나의 온돌방으로 돌아가 온기를 충전해서 온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큰 기쁨이었다는 사실이, 기적을 불러올 만큼 그랬다는 사실이 언제든 나를 괜찮게 한다. 장마처럼 젖은 생일지라도, 구정물의 수력발전소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일지라도.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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