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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턴 떠나자마자 제재완화 요구한 北…찔러보기 협상전술인가

중앙일보

입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 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 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6일 갑작스럽게 발표된 북한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 담화의 핵심은 체제 안전 보장과 제재 완화 요구였다.
“우리의 제도 안전을 불안하게 하고 발전을 방해하는 위협과 장애물들이 깨끗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제거될 때에라야 비핵화 논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문장에 북한이 원하는 바가 담겼다.
지난 2월 영변 핵시설과 제재를 맞바꾸려다 미국의 거부로 결렬된 이른바 하노이 노딜 이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4월 시정연설에서 “제재 해제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북한의 입장은 체제 안전 보장 요구 쪽에 더 무게가 실렸는데 돌연 또 제재 문제를 꺼낸 것이다.

미 선수 교체 노린 찔러보기

이를 두고 북한이 곧 시작될 비핵화 실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이번 담화는 대북강경파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질 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선(先) 비핵화-후(後) 보상’(북한은 선 무장해제-후 정권붕괴로 인식)을 골자로 하는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에 선을 긋는 등(11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대화) 대북 메시지를 발신한 직후 나왔다. 북한이 위협과 장애물부터 제거하라고 한 것은 마치 ‘선 미국 조치-후 비핵화’, 즉 비핵화는 미국이 먼저 조치를 취해야 논의할 수 있는 조건부 협상인 것처럼 교묘하게 틀을 바꾼 것이다.

지난 7월 방한한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변선구 기자

지난 7월 방한한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변선구 기자

그러면서도 ‘최고존엄’의 지침에 따라 제재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발전 저해라고 돌려 말했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 협상술 간파에 능한 볼턴 보좌관이 퇴장했으니 북한 입장에선 큰 장애물이 치워진 셈”이라며 “이를 계기로 일단 원하는 바를 모두 테이블에 올려보려는 것으로 전형적인 북한의 협상전술”이라고 말했다.

인도적 지원, 연락사무소 ‘선제적 퇴짜’

북한은 이미 미국의 상응조치에 대한 기준도 높였다. 북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12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한이 대량살상무기(WMD)를 동결할 경우 인도적 지원과 연락사무소 개설을 검토할 수 있다고 한 데 대해 “미 언론은 종래 강경입장서 후퇴한 것처럼 전했으나 하노이 회담 때 보인 그릇된 계산법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 미측이 이를 협상 테이블에 정식으로 올리기도 전에 퇴짜를 놓은 것이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북한 비핵화 실무협상과 관련하여 한국 당국자들과 전략을 논의하기위해 지난달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북한 비핵화 실무협상과 관련하여 한국 당국자들과 전략을 논의하기위해 지난달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신보는 그러면서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명기한 것은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며 “미국의 핵전쟁위협 제거, 조선을 핵 개발로 떠밀었던 근본 원인을 없애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 대북 적대시정책을 철회하라는 기존의 입장을 또 반복한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미 핵우산 제거”  

대북 소식통은 “전통적으로 북한이 이야기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남한에 대해서도 핵의 보유, 배치, 도입을 금지하는 것(no possess, no deploy, no introduce)”이라며 “미국의 핵우산 제거, 주한미군 철수 등을 뜻한다”고 전했다.
북한은 2017년 6월 정부 대변인 담화에서도 비핵화 5대 조건으로 ▶남한에 배치한 미국의 핵무기 모두 공개 ▶남한에 있는 핵무기 및 기지 철폐, 검증 ▶핵타격 수단 전개 금지 ▶핵 공격 금지 확약 ▶핵사용권을 쥐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 선포 등을 내걸었다.

미 ‘제재=협상 지렛대’ 인식 확고

하지만 협상 재개를 위해 다소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볼턴 보좌관이 있든 없든 미국은 제재 문제에서만큼은 확고한 입장이다. 상황이나 사건이 생겨 건별로 제재 면제를 해주는 것은 몰라도 일부 해제 등 완화는 비핵화 검증이 이뤄질 때까지 안 된다는 것이다.

미북 간 비핵화 로드맵 가능성. [연합뉴스]

미북 간 비핵화 로드맵 가능성. [연합뉴스]

특히 지난해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 이후 한ㆍ미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는데도 북한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자 ‘역시 확실한 협상 지렛대는 제재 유지밖에 없다’는 인식이 워싱턴 조야에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진행하면서도 제재 문제에서 공조하는 한ㆍ미간 워킹그룹은 별도로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 트럼프 2기까지 장기전 의도”  

이를 알면서도 북한이 또 제재 문제를 꺼낸 것은 협상판이 깨지거나 난항을 겪을 경우 미국에 책임을 돌리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 외무성이 협상 전면에 나선 만큼 기존의 협상 시나리오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실무협상 개시 의사는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거친 요구사항은 외무성 미국국장과 언론매체를 통해 내세우는 등 강약조절도 하고 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자존심 때문에 연연하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제재 해제 요구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으니 전면에 내지는 않고 살짝 끼워넣은 것으로 보인다”며 “그보다 체제 안전 보장 요구가 우선일텐데, 이는 트럼프 행정부 1기와 2기를 나눠 장기전으로 가겠다는 뜻으로 올해 3차 정상회담을 해도 지금 모든 것을 내놓고 약속하지는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유지혜ㆍ이유정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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