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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이기면 안 되는 싸움, 이기려 하지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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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

노무현 정부 시절, 영화시장을 좀 더 개방하기로 한 대통령이 이를 반대하는 몇몇 진보단체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국산영화 의무상영일수, 즉 스크린 쿼터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토론은 격렬했다. 일부 인사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대통령을 공격했다. 끝난 후 대통령이 말했다. “진보하지 않는 진보야말로 문제다.” 그리고 또 말했다. “어떻게 자신들만 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나. 다시 마주 앉고 싶지 않다.” 그만큼 마음이 상했다는 이야기였다.

드러난 진보의 위선 잊혀지지 않아 #조국 임명 철회로 당당해지기를…

이들 진보집단은 노 대통령과 잘 맞지 않았다. 대통령과 이들 모두 스스로 진보라 칭했지만, 그 내용과 결은 달랐다.

정책문제만 해도 그랬다. 스크린 쿼터 문제, 금융산업 구조개선법 문제, 사립학교법에서의 개방이사 문제, 이라크파병 문제, 수능 1등급 배분비율 문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사패산 터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제주 해군기지와 원자력발전소 문제 등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에 있어 진보집단과 그 지식인들은 노 대통령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은 그 추모 물결에 올라탔다. 그 주검 앞에서 눈물 흘리며, 오히려 그 물결의 주인이 됐다. 그리고 서민다운 소탈함과 혁신성 등 노 대통령이 상징했던 많은 것의 챔피언이 됐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정권을 잃어 힘이 빠져 있던 민주당 세력과 연합했다.

아이러니였다. 스스로 그렇게 공격해 댔던 정치 지도자의 죽음으로 그 지도자의 상징을 점유하게 됐고, 또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지까지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미 FTA와 제주 해군기지 등, 그 지도자가 걸어왔던 길을 부정하면서 말이다. 그만큼 재주가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들은 언제 나서야 하는지, 또 누구를 내세워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최순실 문제가 터지자 이들은 ‘정의’와 ‘공정’을 무기로 삼았다. 이를 절대적 가치라 생각해서도 아니었고, 스스로 그렇게 살아와서도 아니었다. 상황상 상대를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무기이기에 그렇게 했다.

국민은 이들을 정의롭고 공정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로 여기게 됐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보듯 그들의 삶은 많은 부분 위선이었다. 이들의 권력과 책임이 커지면서 그 위선도 드러나게 됐다. 이들의 본 모습이 하나하나 분명해지는 과정에서 ‘조국 사태’가 터졌다. 자신들의 위선이 드러나자 이들은 지지집단과 진영논리를 동원해 그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 대선 주자들과 총리, 그리고 정치성향이 짙은 작가들까지 한목소리를 내더니, 끝내 다수 국민의 공적이 된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말았다.

끝내 이기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진보집단이 이겨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이들의 승리는 대한민국의 패배이자 도덕과 정의 그리고 공정의 패배다. 문재인 정부와 진보집단 스스로 정당성을 해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들이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아니다. 야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정치판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민은 한번 드러난 위선을 쉽게 잊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품게 한 정권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날카로운 비수를 품게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법무부 장관 임명 때 TV에 비친 문 대통령 모습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투쟁의 정치를 해야 했다. 시대가 그랬다. 여러분은 그러지 마시라. 상생의 정치를 하시라.”

상생의 정치를 위해 문 대통령과 진보 집단은 이 싸움에서 물러서야 한다. 그럼으로써 더 당당하고 자신 있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진보 집단 또한 위선의 탈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조국 장관 임명은 철회하는 게 옳다.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