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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정의와 불의: 한국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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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

정치의 사법화와 도덕의 정치화가 절정이다. 정치의 요체인 가치와 목표, 대화와 타협, 포용과 공존은 사라지고 구호와 진영, 사법과 형사(刑事), 비방과 쟁투만이 난무한다. 정부도, 의회도, 마을도, 거리도, 공원도, 학교도 온통 집단 편싸움이요 핏발선 말다툼이니, 이러고도 나라가 온전하려면 요행을 바랄 수밖에 없다.

정치의 사법화, 도덕의 정치화 절정 #적폐청산 주체와 대상의 극적 혼돈 #그 사이 정의·공정·평등 가치 실종 #다시 불의·불공정·불평등 막아야

집단 패싸움에는 승자가 없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그럴수록 자기 편의 승리라는 단기이익에 눈이 멀어, 밖으로부터 밀려오는 파도는 보려고 하지도 않아 나라의 근본은 점점 무너진다. 따라서 그런 승리는 ‘패배한 승리’일 뿐이다. 나라가 결딴나는 승리다. 대체 정치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정치를 도덕화할 때는 ‘도덕적 정치’가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도덕’이 압도한다. 임마누엘 칸트의 통찰이다. 상대를 부도덕하다고 공격하는 언명만큼 자신 역시 도덕적이어야 하나, 정치에 사용되는 도덕은 타인을 향한 것이지 결코 자신을 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위장과 위선일 수는 있어도 도덕과 윤리의 실현을 위한 자기규율과 공동체 가치는 더욱 아니다. 그렇게 치장하려 할 뿐이다.

상소를 올리듯 ‘적폐청산’담론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누차 강조하였을 때, 그 뜻은 적폐해소를 반대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었다. 한국사회에 누적된 적폐는 꼭 혁파되어야 한다. 권력과 경제력의 소수 집중과 독점, 진영논리, 빈부격차, 불법과 비리, 만연된 공공성 붕괴를 포함해 적폐극복은 필수다. 그것이 없다면 미래는 잿빛이다. 적폐의 뿌리는,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쪽조차 자주 불의와 비리, 편법과 탈법, 사익편취와 공익도륙으로 찌들어있을 만큼 깊다. 공공성의 처참한 붕괴는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

적폐의 해소가 민주적 입법적 절차와 제도에 의해 실현되어야하는 까닭이다. 근대 이후 숱한 나라들의 ‘(급진)혁명과 (과거)복구’, ‘대화와 타협’의 두 조합의 역사가 보여주듯, 분노와 증오에 기초한 전자(혁명과 복구)는 사람청산에만 그치고 후퇴하였음에 반해, 입법과 규칙에 근거한 후자(대화와 타협)는 앞으로 전진하였다. 급진주의와 적폐청산 노선이 민주주의와 적폐극복 경로에 패배한 이유다.

타인·타진영에 대한 적폐청산의 시도는 자기·자기진영 적폐의 지속으로 연결된다. 적폐가 클수록 더욱 그렇다. 혁명의 역설이다. 즉 적폐는 바로 복구되어 자리와 위치만 바뀐다. 적폐를 즉각 철저하게 청산하려면 당연히 권력기구, 특히 청와대 비서진과 검찰과 사법기구 - 과거에는 군부와 정보기구-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적폐청산 정책이 거꾸로 핵심 적폐인 권력기구의 힘을 더욱 키워주게 된다. 정치를 검찰과 법원의 수사·압수·처벌·판결이 주도하는 정치의 사법화와 형사화를 말한다.

되돌리려고 할 때는 이미 늦었다. 또는 내부 대충돌을 각오해야한다. 이미 그 칼은 나와 내 진영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칼을 내려놓고 말로, 검찰과 사법이 아닌 입법과 의회로, 적폐청산이 아닌 적폐극복으로 나아가는 게 가장 철저한 과거극복의 경로인 이유다. 2년을 넘게 우리는 국가 최우선 정책에서 적폐청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과거를 향해 한껏 키워준 칼이 오늘을 향하자, 적폐청산의 열광적인 주체가 적폐청산의 가증스런 대상이 되고 마는 지독한 정신분열은 항상 재연된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장을 ‘싸우는 사랑’, ‘사랑하는 미움’으로 시작하고, 끝장을 ‘암울한 평화’라는 말로 끝낸다. 극적인 형용모순 어법이다. 불행한 행복, 슬픈 웃음처럼. 광장에서 정의·공정·평등·공공성 회복을 열망하였던 우리들은 불의한 정의, 반민주적 민주주의, 적폐창조적 적폐청산의 모순이 없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오늘의 형국은 굴원(屈原)마저 뒤집어야하나? ‘둥근 사각형’처럼 방예원조(方枘圓鑿)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럴수록 난국을 단칼에 돌파할 대위인·초인(Deus ex machina)을 기대하나, 그는 내 진영에게는 위인이지만 타진영에겐 악마일 뿐이다. 광적 지지와 광적 증오를 동시에 받는, 그리하여 위인과 악마의 합성인 무능한 소인배일 뿐이다.

중국 근대정신의 절정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역사책의 인의니 도덕이니 하는 말 사이에 식인이란 글자가 사천년 간 빠져있었다고 통렬히 고발한다. 오늘의 우리는 정의·공정·평등이라는 말 앞에 ‘불’(不)자가 빠져있는지 잘 찾아보자. 지금 우리는 불의·불공정·불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루쉰의 『아Q정전』속의 대화를 보자. “혁명이 났어... 알고 있어?” “혁명, 혁명은 벌써 지나갔어... 너희가 우리를 어떻게 혁명하겠다는 거야?” 그러나 두 대립적인 대화가 무색하게 그는 이 걸작을 놀랍게 끝맺는다. “괜히 헛걸음질만 시켰다.”

다시 『광인일기』다. 마지막 문장이다. “아이를 찾기는 찾아야 할텐데….” 우리도 함께 외치자. “정의를 찾기는 찾아야 할텐데….” 헛걸음을 막기 위해서다. 문제는 또다시 ‘언제, 누구와 함께?’냐다.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