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점의 단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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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엊그제 서울 성북구 일대의 정전소동은 우리 사회의 내면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허점의 총 집약이었다.
우리는 지금 전기가 등잔불을 대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정전이 암흑을 몰고 봤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낭만적인 불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전기는 그렇게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다.
어느 금붕어 가게 주인은 정전으로 산소공급이 안돼 붕어들이 죽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 아이스크림 상점도 15만원 어치의 아이스크림이 다 녹았다고 울상 지었다. 그러나 이것도 당사자들에겐 안된 얘기지만 작은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병원의 경우는 어떻게 되겠는가. 수혈을 하던 펌프가 멎으면 환자는 죽는 수밖엔 없다. 만일 그런 정전이 은행 밀집지역이나 회사들이 임립해 있는 지대에서 일어났으면 그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우선 컴퓨터가 다운된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29시간씩 그 기능이 멈추어지면 경제기능 역시 전신마비 상태가 된다.
물론 오늘의 컴퓨터 시설은 「오토 백」과 같은 장치가 있어서 인풋된 기억소자들이 다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워드 프로세서나 퍼스널 컴퓨터에도 자동충전 장치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도 돌발사대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정전은 컴퓨터 킬러나 마찬가지다.
전략가들의 얘기로는 적대진영의 본부에 폭탄을 퍼붓는 따위는 이제 전략도 아니다. 오늘의 전쟁에선 상대진영의 컴퓨터 시설을 결정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승리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직하다. 모든 전략과 전술을 컴퓨터에 의존하고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우리는 지금 연간 무려 8백60억 kw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때로는 전기가 남는다고 한전에서 관측까지 한다.
우리 사회의 성장을 실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수치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내면엔 정전을 당하고 쩔쩔매야 하는 허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번 성북구의 정전사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 수치로 나타나는 발전만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 내면의 발전까지도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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