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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8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장원>    

사백 년 전 띄운 편지
-김정애

“남들도 우리처럼 이런 사랑 할까요?”
*월영교 달빛 아래 편지를 읽습니다
사백 년 시공을 넘도록 다 못 부른 당신아!
그리움 올올이 엮어 머리칼로 칭칭 감아
애끓는 마음 녹여 씨 날줄 수를 놓고
마지막 가는 발걸음 자욱 자욱 적셨네
자네와 나 새긴 정 찬찬히 읽으시고
꿈 속에 꼭 오시어 여쭙건 답해주오
누구를 아기와 원이는 아버지라 부를까요?

* 경북 안동에 있는 댐. 400여 년 전 무덤 속에서 머리칼로 삼은 미투리와 손편지가 발견

◆김정애

김정애

김정애

1968년생. 2017 제주시조지상백일장 우수상,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

<차상>         

바람집
-김미영

땅에서 솟아났나 하늘에서 떨어졌나
멀쩡한 내 집 마당 삭정이 두서너 개
치우면 치운 그 자리 다시 거기 놓인다.

무심히 올려보니 하늘에 집이 있다
세상에 떠밀렸나 전봇대 끝에 앉아
온몸의 침을 토하여 버무려낸 까치 한 쌍

나뭇가지 천육백 개 들어간 집이라고?
얼기설기 엮어낸 하늘아래 첫 동네
저 허공 무사하기를, 화살기도 날려본다.

<차하>

백세시대
-김귀현

‘가족처럼 모신다’는 광고 걸린 요양병원
백세 꿈에 저당 잡힌 또 한 생이 기탁된다
이승의 마지막 주소 적어두는 통과의례

제 나이 헤는 것이 죄짓는 것만 같아
세상사 인연의 끈 스스로 잘라내는
허공에 붙박은 시선이 한순간 흔들린다

세월에 잘린 기억들 꽃잎처럼 흩날리고
얕은 꿈길 어디쯤에서 무너지는 생의 나이테
노을진 서녘하늘에 붉은 별이 돋는다

이달의 심사평

시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한여름 꿈을 엮은 세 편을 골라 김정애의 ‘사백 년 전 띄운 편지’를 장원으로 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망부가만큼 절절한 시편이 또 있을까만 잘 엮은 수작이다. “남들도 우리처럼 이런 사랑 할까요?”라는 반어적 첫 수부터 시공을 넘은 이승과 저승의 사랑으로 시선을 집중시키지만 애통한 감정의 이내 없이 천연하다. 그 “애끓는 마음”을 다스려 “누구를 아기와 원이는 아버지라 부를까요?”하고 맺으면서도 격한 정조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한 가락에 담아 형상화 하는 솜씨가 더없이 미덥다. 각 장의 행간을 띄워 독자의 감성을 유인하는 기교도 돋보인다.

차상으로 김미영의 ‘바람집’을 고른다. 전봇대 끝 까치 한 쌍의 집짓기가 땅에 발 딛고 살면서도 허둥대는 인간과 대비되어 적실한 울림을 만든다. “나뭇가지 천육백 개”를 “온몸의 침을 버무려” 지은 집과 “저 허공 무사하기를” 비는 평이한 표현이 엇갈리면서도 아찔하다. 다만 시조쓰기의 묘미와 완성은 종장에 있으므로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차하로는 김귀현의 “백세시대”를 선한다. 오늘날 백세시대는 노인들의 역린이다. 건강이 따르지 않으면 고독시대이기 때문이다. “제 나이 헤는 것이 죄짓는 것만 같아” 한마디가 정곡을 찌른다. 우리시대의 풍속도를 여과 없이 그려낸 가작이다. 좀 더 내밀하고 숙성된 사유와 견고한 구조로 심화시켰으면 한다.

심사위원: 이종문, 최영효(대표집필 최영효)

초대시조

이면지가 쌓인다
-김남규

방심하다 모인 감정 새 노트가 될 것이다

조만간 쓸 것이다 쓸 일이 있을 것이다

한 번만
사용한 서운함이나
두 번 볼 일 없으리라

쓰다만 감정마다 ×표를 그리면서

뒷장을 기다린다 기다리다 뒷장이 된다

우리는
뒷장만 가졌다
버려질 걸 알면서

◆김남규

김남규 시인

김남규 시인

1982년 천안 출생,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밤 만 사는 당신』『집그리마』『일요일은 일주일을』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김상옥백자예술상 신인상.

정형률의 범주 내에서, 소재나 어휘 선택의 특질은 한 시인의 개성을 성립시키는 요소가 된다. 또 비유나 상징을 통한 압축적인 의미구성도 필수적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화법의 새로움이다. 시적 사유는 언어를 통해 형상화되므로, 새로운 어법(style)의 출현은 새로운 사유, 정신이 등장했다는 알림표시가 된다.

시조 ‘이면지가 쌓인다’에서는, 처음부터 자기감정의 직입적인 토로와 의미선언이 이루어진다. “방심하다 모인 감정”과 같이 현존은 곧바로 부정되고, “새 노트”를 통해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겠다는 다짐이 따른다. 즉, “×표”가 그려진 전면(前面)의 일상은 부정되고, 사용되지 못한 뒷장들, 나의 본래적인 것들만 모아놓은 “새 노트”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현실적 조건은, “조만간 쓸 것이다”와 같이 여전히 유보적이며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한 번만/ 사용한 서운함”과 같은 감정들은 출력되지 못한 이면지처럼 쌓이다가 결국엔 공란인 채로 버려지고 만다. 설령 “기다리다 뒷장이” 된다 해도 이미 ‘관계’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이제 이면지에 우리의 일상을 대입해 보자. “우리는/ 뒷장만 가졌다/ 버려질 걸 알면서”와 같은 비명이 새어나온다. 여기서 “이면지”는 타자의 얼굴 뒤에 숨겨진 비정규직의 일상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염창권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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