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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9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장원>

분리수거
-한미숙

사무실
의자 하나
길 가에 버려졌다

씨름판 이긴 자의
가차 없는
내동댕이

오늘은
의자 하나가
한 남자를 밀어냈다

◆한미숙

한미숙

한미숙

1958년 충남 연기 출생. 제17회 향장 여성문예 시부문 우수상, 한밭 전국시조 백일장 차상.

<차상>


-조담우

클릭한 입 안으로 번지는 바이러스
치료 버튼 깜짝 놓친 잇몸이 저려온다
몇 개 더 생성이 되는 강력한 백업 파일

완두콩 참깨 밭에 옥수수나무 팥밥까지
바탕화면 열려도 보이지 않는 입쌀의 밥
해킹에 성공한 적이 있는 내용이 야물다

택배로 전송해 온 모정의 압축 파일
저물녘에 불러내어 전등 아래 풀어보면
근심의 1바이트조차 버퍼링 긴 용량이다.

<차하>

목련, X-ray를 찍다
-황병숙

사나흘 손 떨리던 목련이 판독됩니다
봄비가 내린 날도 황사 반점 신열 앓고
저 멀리 자식들 안부
가지에 걸렸습니다

바람 든 무릎 꿇어 수만 번 조아린 흔적
밤 새워 향기 키운 나무만 매만집니다.
검버섯 잎새 사이로
어머니가 절뚝입니다

둥그런 그늘 한 점 속잠 든 목련 품고
딸각, X-ray 형광판 제 할 일 마칩니다
오후가 기울어 갑니다
자식들은 알지 못한

<이달의 심사평>

단시조는 시조가 지닌 미학적 특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 요청인 세계화에도 가장 알맞다. 그런데도 그동안 단시조는 시조계의 대세에서 크게 소외돼  왔으며, 중앙시조백일장에서도 단시조를 장원으로 뽑은 사례가 거의 없었다. 이번 달 장원으로 한미숙의 단시조인 ‘분리수거’를 뽑았다. 작품 자체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문제 제기도 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단시조의 멋과 맛을 역동적인 가락으로 군더더기 없이 보여주고 있는 가편(佳篇)이다. 무엇보다 이해하기가 쉬운 데다, 3장 6구의 작은 그릇 속에다 승자에 의해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진 ‘해고자의 비애’라는 매우 무거운 현실문제가 아주 날카롭게 포착돼 있다. 특히 “오늘은/ 의자 하나가/ 한 남자를 밀어냈다”는 종장에 방점을 찍게 했다.

차상으로는 조담우의 '떡'을 뽑았다. 이 작품은 ‘떡’이 지닌 이미지를 ‘떡’과는 매우 거리가 먼 최첨단 컴퓨터 용어들을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는 매우 참신한 작품이다. 하지만 생소한 용어들이 지나치게 많이 구사돼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데다, 시조의 리듬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한다. “해킹에 성공한 적이 있는 내용이 야물다”라는 구절은 특히 그렇다. 차하로 뽑은 황병숙의 '목련, X-ray를 찍다'는 황사 속의 목련에다 늙으신 어머니를 겹쳐놓은 참 애틋한 작품이다. 무난하긴 하지만, 제 4음보의 글자 수가 5자로 구성된 경우가 많아, 율동적 긴장감을 놓친 점은 아쉽게 느껴졌다.

심사위원= 이종문·최영효(대표집필 이종문)

<초대시조> 

가을 자화상
-서연정

초고(草稿)를 던져주고 여름은 돌아갔다
빽빽하게 들어찬 활자를 솎아내는 일
천지간 들끓는 신열 진통의 시작이다

벌레들 기어간 자국 반점 앉은 잎사귀
덧칠에 서툰 붓질 뜻밖의 그림 본다
찬란한 허구를 꿈꾼 부끄러운 자화상

가을은 온몸으로 생의 불티를 턴다
쏟아지는 그리움 무엇의 암시일까
눈부신 거짓말처럼 목숨이 타고 있다

◆서연정

서연정

서연정

1959년 광주 출생. 1997년 중앙일보 지상시조백일장 연말장원,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광주에서 꿈꾸기』, 『동행』, 『문과 벽의 시간들』 외, 대산창작기금, 광주문학상 외.

글쓰기의 불길 속에 이입돼 사는 동안, 난만한 생의 잔치를 펼쳤던 여름날은 저물고 문득 가을이 다가와 있다. 난장에서 돌아올 때 꾸러미에 꿰어진 것은 무엇인가? 시적 화자는 여름날 키워왔던 것을 “초고(草稿)”라고 한다. 그러나 무성하게 자란 잎과 줄기에 비해 매달린 열매들은 소략하다. “찬란한 허구를 꿈꾼” 것처럼 생의 의욕만 “빽빽하게” 밀집돼 있다. 나를 키웠던 여름은 되돌려진 나의 얼굴이다. “들끓는 신열 진통의 시작”일만큼 생의 욕망이나 집착을 솎아내기는 어렵다. 생의 의욕이 없이는 삶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의욕으로 푸른 불길을 이끌고 왔다. 이제부터 본래적인 자아를 회복해야 한다. “온몸으로 생의 불티를” 털어내면서, 자아를 각성된 자리에 옮겨 놓는다. 그림 밖의 자아가 그 안의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시인의 마당에는 이미 가을이 깊어졌다. 가을은 언제나 저녁과 함께 머문다. 저녁의 몽상은 자유롭고도 내밀하다.

염창권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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