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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였던 그녀가 전사로…총·칼 든 ‘센 언니’ 무대 누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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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호 18면

달라진 뮤지컬 여성 캐릭터

올해 개막한 대극장 뮤지컬 여주인공들은 기존의 공주 캐릭터를 벗고 여전사로 거듭났다. ‘엑스칼리버’의 기네비어를 연기하는 김소향(왼쪽)과 ‘시라노’의 록산으로 분한 나하나 모두 검을 휘두르고 있다. [사진 EMK뮤지컬컴퍼니·CJENM]

올해 개막한 대극장 뮤지컬 여주인공들은 기존의 공주 캐릭터를 벗고 여전사로 거듭났다. ‘엑스칼리버’의 기네비어를 연기하는 김소향(왼쪽)과 ‘시라노’의 록산으로 분한 나하나 모두 검을 휘두르고 있다. [사진 EMK뮤지컬컴퍼니·CJENM]

2019년, 뮤지컬 무대에서 여성 묘사가 달라지고 있다. 입체적인 캐릭터의 남주인공 주변에서 수동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에 머물던 여성들이 총과 칼을 들고 무대를 누비고 있다.

시라노·시티오브엔젤 등 여주인공 #남주인공 이끄는 강한 모습으로 변신 #양성 평등 이슈화로 인식 바뀐 탓 #“여성 서사”“유행 코드” 다양한 평가

최근 개막한 ‘시라노’의 여주인공 록산의 변화가 상징적이다. 드레스 밑으로 바지와 롱부츠를 신고 펜싱 검을 든 그녀는 정략결혼 상대인 백작이 찾아오자 한바탕 칼싸움을 벌이고, 전쟁터에서 깃발을 흔들며 사기 잃은 군인들을 선동한다.

2017년 초연 땐 해맑은 미소로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공주과’였던 그녀다. 전쟁터에도 수레를 타고 몰래 숨어 왔었다. 올 시즌엔 억척스레 수레를 끌고 노인 흉내를 내며 적진을 뚫는다. 올 시즌 연출을 맡은 김동연 연출은 “록산이란 인물의 현대적 해석을 의도했다. 스스로 선택하고 세상과 맞서는 진취적인 인물이어야 시라노의 평생에 걸친 사랑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높아진 관객 눈높이에 맞게 여성 묘사

8월 초 막 내린 뮤지컬 ‘엑스칼리버’도 아더왕 전설의 여주인공 기네비어를 다르게 해석했다. 중세 기사들의 로맨스 대상인 귀부인의 전형성을 깨고 씩씩한 여전사로 뛰어다니며 객석을 놀래켰다. 엑스칼리버를 뽑고 왕이 된 아더에게 제일 먼저 “여자는 존중하는 사람이냐”고 묻고, 동네 여자들을 모아놓고 검술 훈련을 시킨다. 랜슬럿과의 안타까운 사랑도 목검을 부딪치다 싹튼다.

최근 국내 초연에 나선 ‘시티오브엔젤’도 ‘센 언니’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필름 느와르 시대, 제작자에게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시나리오 작가를 변화시키는 건 똑부러진 여자친구다. “눈치 보며 쓴 너의 글은 다 쓰레기” “다 고쳐”라고 호통치다 급기야 장총을 난사하는 강렬한 퍼포먼스까지 선보인다. 눈치 보다 산으로 간 부조리한 스토리와 그렇게 만든 현실을 다 엎어버리겠다는 듯이.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작품이지만, 이 걸크러시 엔딩 장면은 한국 버전만의 연출이다. 오경택 연출은 “바람피고 거짓말하는 남주인공을 응징하는 강한 모습으로 여성 캐릭터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이런 변화가 더 두드러진다. 상반기 최고 흥행작 ‘알라딘’이 대표적이다. 1992년작 애니메이션 버전에선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만 꿈꾸던 ‘자스민 공주’는 2019년 영화 버전에선 스스로 술탄이 되겠다고 나선다. “더 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외치는 자스민의 솔로곡 ‘스피치리스(Speechless)’는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는 ‘홀 뉴 월드(A Whole New World)’ 장면을 제치고 이 영화의 시그니처가 됐다.

‘토이스토리’의 도자기 인형 ‘보 핍’도 확 달라졌다. 3편까지는 우디와 썸타는 캐릭터로 존재감이 미미했지만, 4편에선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를 오마주한 강한 여전사로 변신했다. 인간 주인의 품을 떠나 스스로 삶을 개척한 그는 우디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고 명령한다.

충무로에 간만에 등장한 여배우 주연 영화 ‘걸캅스’도 여자들에게 총을 쥐여줬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가볍게 다뤄지는 디지털 성범죄를 여자들의 연대로 해결한다는 신선한 영웅서사로 호응을 얻었다. 여자 수퍼히어로 ‘캡틴 마블’은 제작자 케빈 파이기가 직접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가장 강한 캐릭터’로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도 쿠도히나(김민정. 왼쪽)와 고애신(김태리)이 칼과 총을 들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사진 tvN]

지난해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도 쿠도히나(김민정. 왼쪽)와 고애신(김태리)이 칼과 총을 들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사진 tvN]

드라마 여주인공도 총을 들었다. 지난해 ‘미스터션샤인’에서 사대부집 규수 고애신(김태리)은 남장에 복면을 쓰고 의병장이 되어 남자들을 이끌고 항일무장운동을 펼쳤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도 기존 드라마의 젠더 전형성을 깼다. 포털 업계를 이끄는 30대 후반 세 명의 ‘센 언니’들은 성취욕에 불타는 전사 캐릭터들이지만 여자끼리 질투하고 모함하는 막장 구도 없이 정당한 경쟁과 공생관계 속에서 프로 직업인의 세계를 그렸다. 과거 드라마의 최종 목표이던 결혼과 연애는 그녀들에겐 뒷전이다. 결혼하자고 매달리고 질질 짜는 건 남자들 몫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비하면 뮤지컬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시공간적 제약 속에서 관객을 몰입시키고 감동시켜야 하는 장르적 특성 탓이다. 고전 명작 등 잘 알려진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는 게 유리하기에 여성 캐릭터의 변화도 더딘 편이다. 관객 대다수인 20~30대 여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멋진 남성 캐릭터가 중심을 차지하게 된 한국적 특수성도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미투 사태와 젠더 갈등으로 양성 평등 이슈가 대두되면서 인식의 변화가 뚜렷해졌다. 영화·드라마로 높아진 관객 눈높이와 무대 위 여성 캐릭터에 격차가 벌어졌다. 2017년 3월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설문조사에 의하면 수동적인 여성캐릭터에 불편함을 느꼈다는 관객 비율이 88%였다.

영화 ‘걸캅스’는 여성들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영웅서사로 호응을 얻었다. [사진 CJENM]

영화 ‘걸캅스’는 여성들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영웅서사로 호응을 얻었다. [사진 CJENM]

업계도 관객의 요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열려있는 창작뮤지컬이 상대적으로 앞서가는 편이다. 2017년 초연된 ‘레드북’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빨간책’ 작가로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원톱 여주인공의 성장 스토리를 그려 이례적인 성공을 거뒀다. 이후 ‘마리 퀴리’ ‘호프’ 등 여성서사의 창작물이 쏟아져 나왔고, 군뮤지컬 ‘신흥무관학교’에서도 남장 여자가 전투의 선봉에 섰다. ‘시라노’‘엑스칼리버’ 등 원작 기반의 작품들도 각색에 나서고 있지만 여성 캐릭터에 살짝 양념친 수준으로, 서사의 큰 줄기를 건드리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전문가들은 이런 ‘여전사 코스프레’를 변화의 걸음마 단계라 진단한다. 이수진 공연평론가는 “업계가 다양한 여성 묘사에 대한 관객의 요구를 깨달은 것”이라면서도 “여성이 단지 칼을 들었다고 다양성을 가지거나 능동적인 인물이 된 건 아니다. 여성은 무조건 선하고 정의롭게 묘사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딱딱하고 전형적인 인물로 주저앉게 됐다. 지금은 ‘여성서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40~50대 여성 서사인 ‘맘마미아’가 올 시즌 유독 성적이 좋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07년 시즌부터 80%대에 머물렀던 객석 점유율이 올해 95%로 껑충 뛰었고, 여성관객과 40대 이상 관객 비율도 각각 5% 이상 점프했다. 신시컴퍼니 측은 “‘맘마미아’는 태생부터 3명의 동갑내기 여성이 의기투합해 만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라며 “최근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뮤지컬 주인공은 남성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맘마미아’에 대한 여성 관객의 지지가 더욱 탄탄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진취적 캐릭터보다 폭넓은 서사 필요

중년여성 관객이 대다수인 브로드웨이에서는 ‘맘마미아’처럼 폭넓은 연령대의 여성서사가 꽤 있다. 여성 동성애를 다룬 파격적인 뮤지컬 ‘펀 홈’이 2015년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래된 작품의 재해석에도 적극적이다. 올해 뉴프로덕션으로 공연 중인 ‘오클라호마’처럼, 과거 가부장적인 작품에서 헤픈 여자로 묘사되던 여자가 당당히 자기 욕망에 대해 소리치는 인물로 바뀌기도 한다.

관건은 단편적 캐릭터를 극복하는 일이다. 여성이 단순히 진취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여성에 관한 폭넓은 이야기들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수진 평론가는 “여성주의적 전환이 한발 앞선 브로드웨이에서는 ‘펀 홈’처럼 과거에 상상도 못했던 작품이 흥행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면서 “한국은 아직 인물에 대한 고민 없이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만 나오고 있다. 살아있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민 없이는 흥행에 성공할 수 없고, 결국 지나가는 유행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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