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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는 가고 냄새는 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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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아는 화가가 합죽선에 난초를 그려 주었다. 너덧 개 잎이 교차하면서 날렵한 구도를 이루고, 덜 핀 꽃 한 송이가 살짝 숨은 부채다. 귀퉁이에 '聞香(문향)'이라고 씌어 있다. 선배가 놀러왔다가 부채를 보고 탐을 냈다. 뭐가 좋으냐고 묻자 '문향'이란 말이 멋있다고 했다. 난초 향기는 맡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 난초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짓은 볼썽사납다. 고결한 향기는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운치가 있다. "난향이 들리면 말하시오, 그때 드릴 테니" 했더니 선배가 겸연쩍게 웃었다. 10년이 넘은 여름날의 일이었다.

잊고 있던 그 선배가 찾아왔다. 그에게만 빨리 간 시간이 얼굴에 완연했다. 양복은 후줄근했고 넥타이는 솔기가 삐져나왔고 구두 뒤축은 납작했다. 악수하자며 내민 손이 예전처럼 곱다. 한때 글 쓰는 직장에서 밥을 번 그 손이다. 꽁치찌개가 끓을 때쯤 소주를 시켰더니 "안 돼, 나, 냄새만 맡아도 쓰러져" 했다. 한 시절 우리는 지독히 마셨다. 그것도 고급 양주였다. 그는 통 크게 놀았고 신용카드를 잘 긁었다. 후배들이 그 선배의 씀씀이 덕에 밤새 잘 놀았다. 들어 보니 그는 술을 끊은 지 꽤 됐다. 속이 탈난 것은 아니었다. 소주 뚜껑을 따면 냄새가 코를 찔러 피한다는 것이다. 대신 담배가 없으면 못 견딘다. 그는 동대문 시장 좌판에서 라오스나 베트남 담배를 산다. 한 갑에 700원이다.

그는 월 23만원을 주고 고시원에 기식한다. 창 없는 방은 20만원이다. 그곳은 불을 끄면 암흑천지다. 3만원을 더 내고 창 있는 방을 얻었다. 잡문 쓴답시고 1만원을 주고 인터넷을 빌렸다. 1만원을 더 내면 TV를 볼 수 있지만 과욕은 접었다. 고시원에서 밥을 주는데, 밥만 준다. 그는 반찬 없이 맨밥을 먹었다. 일곱 끼를 밥만 먹은 날, 토했다. 밥 냄새가 견디기 힘든 걸 처음 알았다. 밥통을 열면 구역질이 났다. 도리 없이 시장에 나가 김치를 샀다. 국산은 비싸 중국산 김치를 1㎏에 1500원 주고 봉지에 담아 왔다. 외출할 때 그는 잘게 자른 김치에 버무린 밥을 비닐에 담아 공원에서 먹는다. 바깥 공기를 쐬면서 먹으면 냄새가 덜 난다. 희한하지, 늘 먹고 마시던 것에서 냄새가 나.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호빵이 먹고 싶었다. 호주머니를 뒤졌더니 500원이 채 안 됐다. 있는 돈을 10원짜리 동전으로 다 바꿨다. 공중전화 부스를 돌아다니며 낙전을 챙겼다. 90원이 남은 전화통에는 10원을 넣고, 10원이 남은 전화통에는 90원을 넣었다. 그러면 100원 동전이 떨어진다. 다섯 시간 동안 마포에서 여의도.신길동.봉천동까지 부스를 들락거리며 낙전을 모았더니 2000원이 됐다. 호빵 네 개를 다 사면 밑천이 사라진다. 500원을 남겨 이번에는 물 좋다는 서울역과 용산역을 찾았다. 그는 두들겨 맞을 뻔했다. 거기는 '고정 고객'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전화를 건 행인이 부스를 빠져나가면 그들은 부리나케 뛰어들었다. 체력이 약해진 선배는 경쟁을 포기했다. 호빵도 못 사먹을 즈음, 그는 내게 전화했다. 그는 꽁치찌개를 깨끗이 비웠다. 밥은 물리쳤다. 그는 그동안 밥을 많이 먹었다.

나는 선배에게 사연을 묻지 않았다. 그는 망한 사람이다. 술도 밥도 넘기지 못하는 이에게 지난 일을 캐묻는 건 비열하다. "담배는 어쩔 셈이요" 하고 말을 돌렸다. "연기는 요기가 안 되잖아, 끊을 참이야." 일어서던 그가 말꼬리를 단다. "과거는 잊어도 냄새는 남는가봐…." 지난 일요일, 문득 선배가 생각나 장롱을 뒤져 합죽선을 찾았다. '문향'이라 쓴 먹색이 여전했다. 밖에 나가 부채를 불태웠다. 부챗살이 금방 오그라든다. 난향은 들리지 않는다. 대나무 타는 냄새가 등천을 했다.

◆ 약력=미술 칼럼니스트. 사단법인 우리문화사랑 운영위원. 저서로 '인생이 그림 같다'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등이 있다.

손철주 학고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