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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에 속아 13억잃은 노인···"죽은 아내가 알려준 것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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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은 지난 6월 A은행 직원에게 속아 13억원의 보험상품을 가입한 심모(82)씨에게 A은행이 7억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미지는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6월 A은행 직원에게 속아 13억원의 보험상품을 가입한 심모(82)씨에게 A은행이 7억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미지는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

경기도에 사는 심모(82)씨는 2007년 가지고 있던 땅이 개발되며 토지수용보상금으로 30억원을 받았다. 평생 농사만 지어온 그는 별다른 투자 지식이 없었고 결국 가까운 A은행을 찾아 전액을 맡겼다.

얼마 뒤 A은행의 VIP실 B팀장을 알게 된 심씨는 종종 B팀장에게 돈 관리에 대해 상담을 했다고 한다. 특히 ‘자식들이 찾아와 돈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늘 걱정이었다. 심씨에겐 4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에는 사업에 실패한 자식도 있었다.

2012년 B팀장은 “맡겨준다면 매달 일정 수익금을 받을 수 있게 해드리겠다”며 심씨에게 A은행에 있는 연금보험상품 가입을 권했다. 돈을 상품에 묶어둔다면 자식들이 목돈을 한 번에 인출할 걱정도 덜 수 있었다. 심씨는 추천받은 상품에 15억원을 투자했다.

2년이 흐른 뒤 B팀장은 다시 심씨에게 “기존에 가입되어있는 연금보험보다 더 나은 수익률의 상품이 있다”고 제안했다. 제안서에는 ‘A(은행 상호) XXXX 특정금전신탁’이라는 상품명이 적혀 있었다. 상호를 보고 은행 상품이라고 믿은 심씨는 13억원을 해당 상품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상품은 B팀장이 꾸며 낸 가짜였다. B팀장은 이 돈을 인출해 주식에 투자하는 등 개인적으로 다 써버렸다.

직원 범죄 사실, 은행 측 연락 못 받아

A은행은 2015년 4월 내부 감찰을 통해 B팀장의 이러한 비리를 알았다. 감찰반의 추궁에 B팀장은 “자신이 가진 은행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그가 은행 측에 작성해 낸 문답서에는 “고객(심씨)은 A은행 관련된 상품에 투자한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라며 “(내가) 타인의 명의를 이용해 횡령했다. 타인들은 계좌만 만들어 줬을 뿐 거래 내용은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은행 측은 그해 8월 B팀장에게 징계면직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B팀장이 은행에서 잘린 지 1년여가 흐른 뒤에도 심씨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은행 측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6년 7월 아내를 떠나보낸 심씨는 상속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A은행을 찾았다.

“계좌에 잔액이 부족해 인출할 수 없다”는 안내를 받고서야 심씨는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A은행은 B팀장의 징계 결정을 내린 지 거의 1년이 지난 뒤에도 심씨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심씨는 “그 당시 은행에 갔을 때까지도 B팀장이 A은행 직원이라고 알고 있었다”며 “죽은 아내가 알려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법정 공방…“거대 로펌에 어떻게 맞서나”

다음 해 심씨와 자식들은 A은행에게 사용자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은행 측은 “심씨와 B팀장 개인 간 거래였다”고 맞섰다. 2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법원은 은행 측이 위험방지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7억원을 배상하라”며 심씨의 손을 들어줬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16부는 지난 6월 진행된 1심 판결에서 “A은행 VIP실 팀장인 B씨는 자신의 신분과 그에 따른 상담 기회와 A은행 업무를 수행하며 얻은 신뢰 등을 이용했고, A은행의 금융상품인 것처럼 계약서를 제시하는 등 치밀한 방법으로 원고를 속였다”며 “이런 편취행위는 A은행의 사무와 직무 관련성이 인정돼 사용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심씨에게 B팀장 외 사람에게 문의나 진위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잘못이 있는 점과 계약이 은행 지점이 아닌 자택에서 이루어진 점 등을 고려해 손해 배상 금액을 전액이 아닌 7억원으로 제한한다고 밝혔다.

A은행은 판결 이후 항소를 위해 대형 법무법인의 금융팀을 고용했다. 심씨는 “은행 직원이 은행 상품이라고 말하는 데 속지 않을 노인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며 “국내 굴지의 은행과 거대 로펌에 어떻게 맞설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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