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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너무 좋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다른 세상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26)

높은 산이 많은 뉴질랜드에서는 산 주변을 산책하듯 자연을 향유하며 걷는 트램핑으로 유명하다. 고원 지대와 거대한 산줄기, 빙하 계곡과 호수 전망에 출발하기 전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사진 박재희]

높은 산이 많은 뉴질랜드에서는 산 주변을 산책하듯 자연을 향유하며 걷는 트램핑으로 유명하다. 고원 지대와 거대한 산줄기, 빙하 계곡과 호수 전망에 출발하기 전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사진 박재희]

태고의 청량함, 원시의 숲길을 잊을 수 없었다. 만년설을 이마까지 내려쓴 고산준령에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과 호수를 품고 있는 곳.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에 눌려 다시 좀비가 되어간다고 느꼈을 때 나는 믿을 수 없이 맑고 푸른 이끼 향이 덮인 숲과 숨 막힐 듯 촘촘하게 하늘을 가로지르던 은하수, 별이 쏟아지던 뉴질랜드의 피오르드랜드를 떠올렸다. 다시 배낭을 꾸렸다.

뉴질랜드에는 3000m급 높은 산이 많다. 세계적 등반가를 많이 배출했고 일상적 등산애호가도 많지만, 등산과 구별하여 산 주변을 산책하듯 자연을 향유하며 걷는 트램핑(Tramping)으로도 유명하다. 그레이트 워크(Great Walk) 가운데 이번에는 케플러(Kepler) 트랙을 걸어보고 싶었다. 터석(Tussock)으로 덮인 고원지대와 거대한 산줄기, 빙하 계곡과 호수 전망. 나는 출발하기 전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케플러 트래킹 고도 프로필. [자료 뉴질랜드 환경보호부(DOC)]

케플러 트래킹 고도 프로필. [자료 뉴질랜드 환경보호부(DOC)]

손터링(Sauntering)이라는 말이 있다. 한가롭게 산책하듯 걷는다는 뜻의 손터(Saunter)는 중세에 성스러운(Sainte) 땅(terre)으로 들어간다는 순례의 의미를 포함한다. 19세기 자연주의자 존 뮤어는 산으로 들어가 걷는 것을 손터링으로 규정한 바 있다. 단순히 온 힘을 다해 걷고 오르는 육체적 행위만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결합하는 순례와 같은 것. 나도 이번 걷기 여행을 트래킹이나 하이킹이 아니라 손터링이라고 정의했다. 자연의 거룩함을 존중하고 땅의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 걷기로 다짐한다.

테아나우 타운에 있는 DOC(자연보호국) 방문자 센터에서 레인보우 리치까지 60km의 순환 루트가 일반적인데 나는 거꾸로 걷기로 했다. 헤드라이너는 마지막에 등장해야지. 아이리스 번 산장에서 럭스모어 산을 지나며 펼쳐질 트랙의 하이라이트를 아껴두고 싶었다. 출발 포인트는 레인보우 리치이다. 출렁다리를 지나면 향기가 밀려오는 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기습적으로 청량한 입자가 몽글몽글 피부에 와서 닿았다.

깊은 숲길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이끼 식물과 고사리 숲을 비춘다. 푹신한 트랙을 따라 걸으며 산장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겹겹의 산봉우리와 빙하 호수가 눈도장을 찍었다.

깊은 숲길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이끼 식물과 고사리 숲을 비춘다. 푹신한 트랙을 따라 걸으며 산장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겹겹의 산봉우리와 빙하 호수가 눈도장을 찍었다.

와이라우 강을 따라 걷는 동안 피오르드랜드 숲길의 전령인 이끼와 너도밤나무를 만나게 된다. 깊은 숲길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조각 햇살이 빼곡하게 자라는 이끼 식물과 폭신하게 자라는 고사리 숲을 비춘다.

첫날은 6km가량의 평탄한 짧은 여정이다. 나뭇잎이 덮어 푹신한 트랙을 따라 걸으며 배낭 무게에 적응하면서 모투라우(Moturau) 산장으로 간다. 처음 나타난 뷰포인트는 케플러 습지였다. 나무 데크 길을 따라 들어가니 앞으로 펼쳐질 겹겹의 산봉우리와 빙하 호수가 나타나 눈도장을 찍었다.

모투라우 산장은 깊숙한 산속 호숫가에 있다. 사람들은 짐을 풀고 바다 같은 호수로 나가 자연 수영장에서 알몸 수영을 한다. 나흘간 전기도 와이파이도 샤워도 할 수 없는 야생의 생활에 들어왔다는 신고식인 셈이다. 10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남반구의 여름밤, 사람들은 샌드 플라이(흡혈파리)를 피해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깼다. 시리도록 파란색으로 빛나는 별이 하늘에 빼곡 촘촘하다.

햇살마저 어깨를 좁혀야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길. 나뭇등걸에 앉아 땀을 닦으면 일상의 번뇌가 함께 떨어진다.

햇살마저 어깨를 좁혀야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길. 나뭇등걸에 앉아 땀을 닦으면 일상의 번뇌가 함께 떨어진다.

두 번째 날은 완만해도 두 개의 오르막을 넘어 16.2km 산길을 간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저지대 숲길이 온전히 고사리 세상이었다. 남자 어른의 어깨높이까지 자라는 고사리와 이끼를 빨래처럼 매달고 있는 너도밤나무들이 빼곡한 오르막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숲을 울리는 새소리에 턱까지 차오르는 숨소리가 섞였다. 햇살마저 어깨를 좁혀야 겨우 들어설 수 있는 길. 나뭇등걸에 앉아 땀을 닦으면 덕지덕지 붙어있던 일상의 번뇌가 함께 떨어진다.

폭우와 산사태는 거대한 산맥마저 끊어버렸다. 산맥의 절개지 주변은 까마득하게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산봉우리가 이어진다. 꿈결처럼 걷다가 발목까지 자라는 민들레 꽃밭에 앉아 쉬었다.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누구와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여름날 만년설을 눈썹까지 덮은 거대한 산과 숲을 굽이굽이 지나 아이리스 번 산장에 도착했다. 아이리스 산장 앞 너른 벌판에 금빛 햇살이 물결치고 있었다.

난 배낭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대로 서서 고원지대의 터석(Tussock)이 빛을 품고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바람을 타고 춤추고 있었다. 눈물이 찔끔. 완전하게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뉴질랜드 남섬의 높은 삼림지대에 사는 앵무새 키아는 호기심이 많고 머리가 좋은 새이다. 사람을 유인해 먹을 것을 가져가거나 등산스틱을 물어가기도 한다. 사라진 내 슬리퍼도 키아의 짓이다.

뉴질랜드 남섬의 높은 삼림지대에 사는 앵무새 키아는 호기심이 많고 머리가 좋은 새이다. 사람을 유인해 먹을 것을 가져가거나 등산스틱을 물어가기도 한다. 사라진 내 슬리퍼도 키아의 짓이다.

슬리퍼가 사라졌다. 뉴질랜드 남섬의 높은 삼림지대에 사는 앵무새의 일종인 키아(Kea) 짓이다. 키아는 호기심이 많고 머리가 좋은 새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진을 찍으려 다가오는 사람을 조금씩 움직이며 유인해 낸 후에 배낭을 열어 먹을 것을 가져가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등산화나 등산스틱을 물어가기도 한다. 터석에 넋을 잃은 대가였다.

사흘째 되는 날은 케플러 트랙의 하이라이트인데 난 아이리스 번 산장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온종일 터석이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두 개씩이나 지나야 하는 날이지만 인생 경험을 선사하는 날이라지 않던가! 채비하고 나서면 곧바로 오르막이다. 고사리가 나무처럼 자라고 너도밤나무에 이끼 풀까지 울창한 숲에는 가끔만 하늘이 힐끔힐끔 보였다.

하늘을 향한 계단처럼 아찔하게 솟은 산을 타고 올라 호수를 따라 내달리는 산줄기를 마주하며 걸을때는 멋있다는 말조차 잊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하늘을 향한 계단처럼 아찔하게 솟은 산을 타고 올라 호수를 따라 내달리는 산줄기를 마주하며 걸을때는 멋있다는 말조차 잊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숨을 토하며 세 시간의 오르막 후, 믿을 수 없는 풍경으로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다. 터석이 굽이굽이 이어진 산등성이로 펼쳐지고 빙하 호수는 까마득하게 발밑에 있다. 빅슬립에서 아득해 올려다보기도 힘들던 산봉우리와 눈을 맞추면서 나는 ‘좋다’ ‘너무 멋있다’를 반복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말은 딱 두 가지였다. “좋다. 너무 좋다.” 그리고 “멋있다. 너무 멋있다.”

하늘을 향한 계단처럼 아찔한 절벽 위로 솟은 뾰족한 산 등을 타고 올라서 호수를 따라 내달리는 산줄기를 마주하며 걸으면 그때는 좋다, 멋있다 그런 말조차 잃는다. 탄성만 뱉게 된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경험. 경이의 풍경은 끝이 없는 듯 이어졌다.

마지막은 언제나 아쉽다. 오롯이 몸과 마음에 집중한 나흘간의 일정을 되돌아보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마지막은 언제나 아쉽다. 오롯이 몸과 마음에 집중한 나흘간의 일정을 되돌아보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쏟아지는 저녁 햇살을 흡수하며 도착한 럭스모어 산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마지막 날은 언제나 아쉽다. 아쉽고도 벅차다. 나흘째 되는 날 석회암 벼랑으로 내리막을 지나는 14km 하산길이 마지막이다. 지난 삼일 동안 광대한 풍경 속 일부가 되었던 벅찬 기억을 흘리지 않으려고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몸과 마음에 집중한 나흘간, 60km 케플러 트래킹 아니 손터링을 기록한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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