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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엔 람 장관이 이겼다···홍콩시위 두 여걸의 리턴매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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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홍콩의 가수 겸 배우 데니스 호(왼쪽)와 캐리 람 행정장관. [AP, AFP=연합뉴스]

홍콩의 가수 겸 배우 데니스 호(왼쪽)와 캐리 람 행정장관. [AP, AFP=연합뉴스]

홍콩의 대규모 반정부·반중국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만명 이상의 시위대가 도로를 점령하더니 이번에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연출된 홍콩-중국의 충돌 장면과 홍콩 행정장관의 모호한 발언이 지난 주 홍콩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두 사건엔 공통점이 있는데요, 모두 여성이 중심에 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인기 가수 데니스 호와 홍콩의 첫 여성 행정장관 캐리 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성이 서로 과거의 악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홍콩 민주화 물결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가수에서 민주화 투사로 변신한 데니스 호 #진보 정치인이었다 친중 낙인 찍인 캐리 람

호, 톱스타에서 민주·인권 운동가로

호는 가수로 무대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교사 부부의 딸로 홍콩에서 1977년 태어나 캐나다로 건너갔다가 홍콩으로 돌아왔는데 우연히 기회를 잡았습니다. 19살이었던 1996년 홍콩의 한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했다가 메이옌팡의 눈에 든 것입니다. 메이옌팡은 한국에선 매염방으로 유명한 중화권 배우입니다. 호는 2001년 첫 번째 앨범 '퍼스트'를 선보이며 재능을 본격적으로 펼쳤습니다.

배우 경력으로 봐도 호는 발군이었습니다. 2011년 두기봉 감독의 영화 '탈명금: 사라진 천만 달러의 행방'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이듬해 대만의 골든호스상(금마장)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데니스 호. [사진 데니스 호 트위터]

데니스 호. [사진 데니스 호 트위터]

배우로, 가수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호가 본격적인 인권운동가로 변모해 대중 앞에 등장한 시기는 2012년입니다. 35세 나이에 동성애자임을 선언하고 그해 11월 열린 제4회 홍콩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면서죠. 홍콩에서는 성 소수자를 ‘퉁즈(tongzhi)’라는 은어로 부른다고 합니다. 한문으로 쓰면 동지(同志)입니다.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성전환자(LGBT)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과 차별 속에서 호를 비롯한 성 소수자들을 더욱 단단하게 이어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 호에게 결정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2014년 그는 중국의 연예시장에서 퇴출을 의미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겁니다. 홍콩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우산혁명'을 지지하고 그들을 응원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에서였죠. 결국 당시 우산혁명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5년 뒤인 올해 '범죄인 인도법'이 촉발한 대대적인 시위에서도 호는 홍콩의 민주화 물결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홍콩 시위대와 함께 행진 중인 데니스 호. [사진 데니스 호 트위터]

홍콩 시위대와 함께 행진 중인 데니스 호. [사진 데니스 호 트위터]

호는 배우와 가수가 아닌 퉁즈로 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무대보다 거리가, 화려한 조명보다 최루탄과 경찰의 진압봉이 호의 친구가 됐습니다. 지난 8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호가 홍콩의 인권문제를 호소하게 된 것도 이러한 그의 삶의 궤적 덕분이었습니다.

호는 제네바에서 홍콩 정부의 범죄인 인도법과 관련한 시위 진압 행태를 전하며 "홍콩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중국이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홍콩의 자치는 약화되고 있다"고 말했죠. 그의 발언은 한 번에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호의 발언에 중국 외교관들이 두 번이나 의사 개진을 방해하는 이례적인 장면까지 연출됐습니다.

람, 진보 지식인에서 친중 정치인으로

민주·인권 운동가 호가 적극 지원사격을 했던 2014년 우산혁명을 막은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지금의 홍콩 첫 여성 행정장관인 람입니다.

람은 2017년 행정장관 자리에 올랐습니다. 선거인단 방식으로 진행되는 홍콩의 행정장관 선거에서 선거인단 총 1200표 중 777표를 끌어당기는 저력을 보여줬습니다. 홍콩 정계에서는 람 장관의 친중 성향이 중국의 눈에 들어 장관이 될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대적으로 발생한 우산혁명에 맞선 실무자 출신이었으니, 중국 처지에서는 만족스러운 카드였다는 분석이죠. 당시 람 장관에게 '쓰리세븐(777)'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난 2일 홍콩 거리에 캐리 람 행정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일 홍콩 거리에 캐리 람 행정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람 장관은 처음부터 친중 성향의 관료였던 것은 아닙니다. 1957년 홍콩에서 태어나 홍콩대학을 졸업하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인 1970년 대학생 시절에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칭화대와 교류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인 적도 있고요. ‘민주파’ 인사이자 정치인인 리윙탓(李永達), 신중카이(單仲偕) 등과도 이때 교류했습니다.

홍콩에서 공무원이 된 후 람 장관의 성향이 변화했습니다. 사회복지부 국장으로 일하던 2000년 당시 람 장관은 포괄적사회보장제도에서 이민자와 7년 이하 홍콩 거주자를 제외하는 등 복지정책 축소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람의 선거캠프에서 활동한 홍콩의 성공한 사업가 알란 지맨은 뉴욕타임스에서 캐리 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캐리는 매우 매우 영민합니다. 극도로 똑똑하죠. 그리고 아주 아주 단호하고 엄격합니다. 그가 뭘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해내고 맙니다."

람의 성향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언입니다. 람이 2007년 개발부의 수장으로 일할 당시 주민의 반대를 물리치고 영국 통치를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인 ‘퀸스피어’를 철거해 '거친 싸움꾼'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지난 9일 범죄인 인도법 관련 발언을 하고 있는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9일 범죄인 인도법 관련 발언을 하고 있는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로이터=연합뉴스]

람과 호가 다시 만났습니다. 우산혁명 당시 홍콩 정부의 정치개혁 TF 일원으로 활동하며 시위대를 해산한 강력한 정치인 람과, 민주화를 지지하며 대학생들을 지원사격한 호가 이번엔 범죄인 인도법이 촉발한 민주화 시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람 장관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고, 람 장관은 "범죄인 인도법은 죽었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시위대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실패했습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장관과 투사의 운명도 홍콩의 운명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전망입니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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