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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100m 앞두고 선발조 철수…‘후보’ 고상돈 첫 정복 영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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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호 25면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와 네팔 국기를 들고 선 고상돈 대장. 당시 에베레스트 등반가들에게 산소마스크는 필수였다. [중앙포토]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와 네팔 국기를 들고 선 고상돈 대장. 당시 에베레스트 등반가들에게 산소마스크는 필수였다. [중앙포토]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1차 등반조 산소 조절 미스로 실패 #고상돈, 돌로 아령하며 컨디션 조절 #소득 1000달러 시대에 희망 안겨 #1979년 만삭 아내 두고 매킨리 등반 #14시간 산행 후 하산하다 추락사 #올해 40주기 맞아 기념관 건립 추진

1977년 9월 15일, 고상돈(1948∼1979)은 해발 8848m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이렇게 외쳤다. 세계 여덟 번째로 대한민국이 지구 최고봉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위아래 빨강 방한복에 산소마스크를 쓴 그의 모습은 약간은 괴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지금이야 무산소 등정이 기본이고, 고산 등반 좀 한다는 사람은 누구나 에베레스트를 꿈꾼다. 그러나 1인당 소득 1000달러를 겨우 달성한 1977년, 장비도 열악하고 경험도 없고 산악인도 많지 않던 그 시절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온 국민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준 쾌거였다. 그의 뒤를 따라 허영호-엄홍길-박영석 등 걸출한 산악인이 배출됐다.

올해는 고상돈 대장이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등정하고 하산하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지 40주년이 된다. 그의 숨결을 따라 지인들을 만났고, 고향인 제주까지 내려갔다.

150분 사투 끝에 마지막 9m 빙벽 올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청룡장을 수여받는 고상돈 대장.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청룡장을 수여받는 고상돈 대장.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원래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1차 정상 공격조가 아니었다. 77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대 김영도 대장은 베이스캠프부터 5차 캠프까지 대원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지켜보며 정상에 도전할 대원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고상돈은 아령 크기의 돌로 웨이트 운동을 하고 불필요한 움직임을 자제하면서 컨디션을 관리하고 있었다.

9월 5일, 김 대장은 모든 대원을 모이게 한 뒤 정상 공격조를 발표했다. “1차 공격은 9월 9일 박상열과 앙 푸르바(셰르파), 2차 공격조는 고상돈과 한정수, 날짜는 1차 결과를 보고 정한다.”

등반부(副)대장인 박상열은 수영과 럭비 선수 출신으로 뛰어난 체력과 자신감으로 무장한 산 사나이였다. 셰르파들도 8000m급 고산에서 산소통도 없이 돌아다니는 그를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너무 큰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9월 9일 새벽, 김 대장은 캠프 5(8510m)에 있는 박상열에게 무전을 해 컨디션이 어떤지 물었다. 박상열은 “간밤에 산소가 떨어져 그대로 잤더니 속이 좀 메스껍습니다”고 했다. 그 순간 김 대장은 ‘실패’를 직감했다고 한다. “산소를 충분히 마시고 자라”고 신신당부한 김 대장의 말을 박상열이 흘려들은 것이다. 산소 부족으로 컨디션이 크게 떨어진 박상열은 예정 시간을 두 배 이상 지체했고, 결국 정상을 100m 남기고 산소가 떨어져 철수해야 했다.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이었다.

2차 공격일은 9월 15일로 정해졌고, 고상돈의 파트너는 노련한 셰르파인 펨바 노르부로 바뀌었다. 오전 5시, 정상에서의 사진 효과를 고려해 빨강 옷을 입은 고상돈이 20kg의 짐을 메고 캠프를 나섰다. 4시간 만에 남봉에 도착해 산소통을 갈아끼웠다. 앞에는 50m 길이의 칼날 능선이 버티고 있었다. 좌우는 끝이 안 보이는 벼랑이고 능선은 너무 뾰족해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장섰던 펨바가 ‘되돌아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고상돈은 앞으로 나서 오른팔로 커니스(눈처마)를 껴안듯이 하고 스텝을 만들며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천신만고 끝에 칼날 능선을 통과하자 직벽에 가까운 9m 빙벽 ‘힐러리 침니’가 앞을 가로막았다. 2시간 30분 사투 끝에 힐러리 침니를 올라섰다.

작은 언덕 세 개를 넘으니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였다. 필사적으로 오른 뒤 두리번거리며 정상을 찾았다. 펨바가 “여기가 정상”이라고 소리쳤다.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발에 뭔가가 걸렸다. 눈을 헤쳐 보니 카메라 삼각대였다. 순간 김 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정상에는 75년 중국 원정대가 세워 놓은 삼각대가 있을 거다. 그게 정상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고상돈과 펨바가 얼싸안았다. 1977년 9월 15일 낮 12시 50분이었다.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등반을 목표로 설악산에서 훈련하다 숨진 최수남·송준송·전재운 대원의 사진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묻었다.

고상돈의 쾌거는 온 국민의 기쁨이었다. 에베레스트 등정 기념우표와 주택복권이 발행됐고, 기념담배도 출시됐다. 김포공항으로 개선한 원정대는 신촌∼서소문∼창경궁으로 이어진 카 퍼레이드를 펼쳤다. 그 장면을 보며 ‘나도 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 소년이 있었으니 훗날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고(故) 박영석(1963∼2011)이다.

제주시에서 열린 에베레스트 등반대 환영 카 퍼레이드.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제주시에서 열린 에베레스트 등반대 환영 카 퍼레이드.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은 고상돈은 고향 제주, 청춘 시절을 보낸 청주에서도 카 퍼레이드 환영을 받았다. 원정대의 사진과 장비를 전시한 순회사진전도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관람했다.

1978년 4월 17일 정종택 충북지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 고상돈-이희수 커플.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1978년 4월 17일 정종택 충북지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 고상돈-이희수 커플.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1978년 4월 17일 고상돈은 이희수양과 청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76년 겨울, 대전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던 이씨를 소개받은 고상돈은 첫눈에 마음이 끌렸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두고는 목도리를 만들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고상돈은 등정 내내 그 목도리를 갖고 있었고, 정상에 오르던 날도 목도리를 배낭에 챙겼다.

박훈규 전 고상돈기념사업회 이사장.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박훈규 전 고상돈기념사업회 이사장.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78년 여름, 미국 순회 사진전을 다녀오면서 고상돈은 매킨리(6194m)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상돈은 고향 친구인 박훈규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박훈규는 76년 2월 설악산 훈련 중 눈사태 당시 제일 먼저 눈을 뚫고 나와 대원 2명을 구조한 산악인이다. 그는 77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선발됐으나 노모(老母)의 결사반대에 부닥쳐 꿈을 접어야 했다.

79년 5월 29일, 매킨리 원정대 A조(고상돈·박훈규·이일교)는 마지막 캠프(5029m)까지 진출한 뒤 다음날 정상 공격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후 4시 40분 B조로 무전이 왔다. 11시에 캠프에 도착했는데 기상이 좋고 시간이 충분할 것 같아 계속 전진하고 있다. 앞으로 1시간이면 등정이 가능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저녁 7시 15분 고상돈 대장에게서 무전이 왔다. “여기는 정상이다. 바람이 너무 세고 추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하산하겠다. 지원해 준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고상돈의 마지막 말이었다.

고상돈 대장 추모식에서 헌화·분향하는 이희수 여사.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고상돈 대장 추모식에서 헌화·분향하는 이희수 여사.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훗날 사람들은 “이틀에 걸쳐 오르기로 한 거리를 14시간 이상 걸어갔다. 강풍이 부는데 왜 무리하게 정상 공격에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 답은 고상돈만이 알 것이다. 당시 3개 팀이 정상을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고 한다.

한국인 최초로 매킨리에 오른 세 사람은 자일로 서로를 묶고 하산하던 중 눈사태를 만났다. 매킨리를 취재하던 한 기자가 망원경으로 이 장면을 봤다. 정상 부근에서 세 물체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800m 이상 추락해 해발 5000m 설벽에 떨어졌다는 거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고상돈은 사망, 이일교는 중태, 박훈규는 심한 동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일교는 숨졌고 목숨을 건진 박훈규는 손가락 8개를 잘라야 했다.

‘일본판 고상돈’ 우에무라, 전국에 기념관

79년 6월 4일 경기도 광주 한남공원묘지에서 거행된 고상돈 대장의 하관 모습.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79년 6월 4일 경기도 광주 한남공원묘지에서 거행된 고상돈 대장의 하관 모습. [사진 고상돈기념사업회]

지난 5월 29일 한라산 1100고지 고상돈 기념비 앞에서 ‘산악인 고상돈 4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이희수 여사가 봉분에 술을 뿌렸다. 40년 전 그날, 이 여사는 딸 현정씨를 뱃속에 품고 있었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 한남공원묘지에 안장됐으나 제주 출신 인사들이 “제주에서 나고 한라산에서 꿈을 키운 고상돈은 당연히 제주에 묻혀야 한다”며 모금을 해 80년 지금 위치로 이장했다.

박훈규 전 고상돈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기념사업회를 이끌었다. 1100도로 중 18km를 ‘고상돈로’로 지정하고 매년 2000여 명이 참가하는 고상돈 걷기대회도 개최했다. 박 전 이사장은 “어렵고 배고팠던 시절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준 게 고상돈”이라고 했다.

이들의 마지막 소망은 고상돈 기념관을 짓는 것이다. 우에무라 나오미(1941∼1984)는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고 매킨리에서 실종됐다. 그의 고향인 효고현과 도쿄에는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관이 있고 홋카이도에도 그의 이름을 딴 야외 학교가 청소년에게 모험 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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