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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몰랐다, 행복의 조건 다 갖춘 여배우의 불행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8)

아서왕은 수많은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샬럿의 아가씨'는 아서왕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영화 '엑스칼리버'와 '아쿠아맨'도 이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사진은 영화 아쿠아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아서왕은 수많은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샬럿의 아가씨'는 아서왕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영화 '엑스칼리버'와 '아쿠아맨'도 이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사진은 영화 아쿠아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거울이 양쪽으로 깨지자, 내게 불운이 닥쳐왔다.(The doom has come upon me)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이 아서왕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 ‘샬럿의 아가씨(The Lady of Shalott)’에 나오는 시 구절이다. 아서왕의 용맹스러운 기사 랜슬럿의 모습이 수정 거울에 비치자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랜슬럿을 사모하게 된 아가씨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저주의 운명을 거부하고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삶의 빛이자 그림자인 것. 인간의 삶에 활력을 부여하는 묘약이자 파멸로 이끄는 저주 같은 것. 그게 사랑이라고 모두 알고 있지만 어떤 과학이, 어떤 문명의 이기가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 신비로운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저 순진무구한 샬럿의 아가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움을 견뎌내고 사랑의 운명을 거부했더라면 나머지 삶이 행복했을까. 샬럿의 아가씨는 배에 실려 홀로 랜슬럿이 있는 카멜롯을 향해 흘러간다.

카멜롯의 랜슬럿을 만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형벌의 고통과 함께 가는 길이지만 그녀는 비로소 살아있음의 아름다움을 소름 돋도록 전율하며 느끼고 있지 않을까. 주검으로 카멜롯에 도착한 샬럿의 아가씨를 발견한 랜슬럿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을 알지 못한 채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애도했다는 구절로 시는 끝을 맺는다.

‘사랑이 없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끊임없이 불리는 사랑의 노래 앞에 시간과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1962년도에 발표된 아가사 크리스티의 깨어진 거울(원제: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은 아름답고 가슴 아픈 범죄 비극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의외의 범인, 의외의 동기를 아울러 운명적인 비극을 그려낸다. 줄거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깨어진 거울' 표지. [사진 이광현]

'깨어진 거울' 표지. [사진 이광현]

유명한 미국인 영화배우 마리나 그레그가 저택 고싱턴홀을 사서 이사를 온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해온 여배우 마리나. 마리나가 남편과 함께 개최한 세인트 존 야전병원 후원파티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친절의 화신인 헤더 배드콕이 독이 든 칵테일을 마시고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헤더가 마신 칵테일은 원래 마리나가 마시려고 했던 잔에 담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살인의 진짜 대상은 마리나였던 게 아닐까?

“헤더 배드콕을 죽이고 싶어 한 사람이 있었나요?”
“아뇨. 그녀를 증오할 정도로 싫어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아요(Noboby seems to have disliked her to the point of hatred).”
“그렇다면 살인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한 거로군(You’ve drawn a blank).” ”마리나 그레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건 불가능할 거예요. 마리나는 완전히 지친 상태예요(She’s absolutely prostrated).”
“불운이 그에게 닥쳐오는 것을 본 샬럿 아가씨까지는 아니더라도(Without going so far as to look like the Lady of Shalott seeing doom coming down upon her), 마리나 그레그는 그를 당혹스럽게 했거나 괴롭히는 어떤 것을 본 것 같아요(Marina Gregg might have seen something that vexed or annoyed her).”

드라마 '미스 마플' 시리즈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깨어진 거울'에 등장하는 인물인 제인 마플을 소재로 만들었다. [사진 드라마 미스 마플]

드라마 '미스 마플' 시리즈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깨어진 거울'에 등장하는 인물인 제인 마플을 소재로 만들었다. [사진 드라마 미스 마플]

“러드, 당신은 헤더 배드콕의 독살이 전적으로 사고였다고 생각하세요(Has it occurred to you, Mr. Rudd, that the poisoning of Heather Badcock may have been entirely accidental)? 즉, 그 독극물은 당신의 아내인 마리나를 겨냥한 것(That the real intended victim was your wife)이란 생각 말이에요.”

“난 내 아내가 한순간이라도 독살의 위험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당사자가 그 자신이라는 의심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거죠(I didn’t want my wife to suspect for one moment that it was she who had narrowly escaped dying by poison).”
“적이라고요? 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와 내 아내는 세상의 부러움과 질투를 많이 받은 건 맞아요(There’s plenty of envy and jealousy in the world my wife and I occupy). 마리나가 때때로 사람을 함부로 대한 적은 있어도, 지속적인 악의를 부추길 만할 정도의 것은 없었어요(There is nothing to cause any lasting ill-will).”

헤드 배드콕 독살의 미스터리가 미궁 속으로만 빠져가는 와중에, 우리의 인자한 할머니, 미스 마플이 등장한다.

“내가 관심을 가진 건 인간의 본성이죠(It’s human nature I’m interested in). 인간의 본성이란 영화배우건, 병원의 간호사건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Human nature is much the same whether it’s film stars or hospital nurses). 마리나를 살해할 근사한 동기들은 부지기수로 많죠(There are lots of wonderful motives for murdering Marina). 모든 드라마의 소재(All the stuff of drama), 부러움과 질투와 사랑이 얽혀있는(envy and jealousy and love tangles) 그런 것이죠.”

“마리나는 결국 그의 과거에서 비롯된 이유로 인해 비극의 원인이었던 미지의 인물에 대한 증오를 평생 품어왔다고 생각해요(Marina had nursed all those years a kind of hatred for the unknown person who had been the cause of her tragedy).”

드라마 '미스 마플' 시리즈 중 한 장면. 미스 마플의 따뜻한 인상은 피해자 주변 사람이 진술을 술술 털어놓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그는 예리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풀어나간다. [사진 미스 마플 스틸]

드라마 '미스 마플' 시리즈 중 한 장면. 미스 마플의 따뜻한 인상은 피해자 주변 사람이 진술을 술술 털어놓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그는 예리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풀어나간다. [사진 미스 마플 스틸]

유명 여배우라는 ‘화려함’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뇌와 번민’의 비극을 아가사 특유의 정교한 기법으로 다룬 걸작이다.

일생을 살면서 사람이 누리는 행복과 감수해야 할 불행은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여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뿐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길 꿈꾸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물질적인 풍요, 원만한 가족 관계, 즐겁고 보람 있는 일….

객관적으로 행복을 보장해 줄 것으로 간주하는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일지라도 불행이라는 불청객을 거부할 수가 없다. 절대적인 행복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다. 결국에 세상만사는 각자가 선택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행복도 불행도 자초할 수 있는 요술 상자인지도 모른다. 원효의 ‘일체유심조’ 사상이 온고지신의 교훈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이광현 아름다운인생학교 강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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