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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정부도 모르는 땅속 지도…GTX 뚫다 우리집 냉난방 끊길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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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지하 터널 공사 개념도. 최근 GTX 등 수도권 도심 지하를 관통하는 대심도(평균 심도 40m 이상) 공사가 늘고 있다. [사진 동일기술공사]

지하 터널 공사 개념도. 최근 GTX 등 수도권 도심 지하를 관통하는 대심도(평균 심도 40m 이상) 공사가 늘고 있다. [사진 동일기술공사]

한양대 교수들 “대심도 지하개발 하다 건물 파이프 훼손 우려” 
GTX 등의 대심도(평균 심도 40m 이상) 지하 개발을 하다가 위 건물의 냉·난방을 끊을 위험이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심도 개발이 활성화하는 만큼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도심 대심도 지하개발 불안 #지열 파이프 등 매립 정보 없어 #터널 뚫다 파이프 파손 가능성 #정부, 매립 현황 재조사하기로

한양대 공학대학원 건설관리학과 김재준·서종원·김주형 교수는 2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들은 소속 학과의 석사학위 논문 ‘도심 대심도 지하개발에 따른 지하시설물 파손 사례 및 제도적 개선 방향에 관한 연구’(오는 8월 발간 예정)를 참고 자료로 제시했다.

교수들은 “수도권 주요 지역의 대심도에선 수평으로 터널을 뚫다가 상위 건물에서 수직으로 내려진 파이프류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근 이 지역에 수직 파이프류가 상당수 매립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건설업체들에 수직 파이프류 매립 정보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공사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수직 파이프를 파손하고 상부 건물의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분석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지열 냉·난방 건물 가장 문제…이미 사고 발생
수직 파이프류 중 지열 파이프가 가장 큰 장애물로 꼽힌다. 정부가 2008년부터 신재생에너지 장려 정책을 펼치면서, 최근까지 지열 냉·난방 시스템을 적용한 건물이 급증한 까닭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수도권에서 지열 냉·난방 시스템을 갖춘 건물(주택 포함)은 1만 채가량이다.

이미 대심도 공사를 하다 지열 파이프를 훼손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겨울 서울의 A대심도 지하도로 공사 현장(평균 심도 60m)에서 수평으로 터널을 굴착하던 도중 위 건물로부터 수직으로 내려진 지열 파이프(길이 150m) 다발의 중간 부분을 훼손했다고 한다. 이 사고로 건물 전체의 난방이 끊겼고, 건물주는 임시 보일러를 도입했다. 현재 사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두고 건설사 대 건물주, 건설사 대 설계업체 간 법적 분쟁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12월 서울 영등포구 코레일유통 건물의 난방 중단 사고도 유사 사례다. 이 밖에도 지하수 관정을 파괴해 건물의 물 공급이 중단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공사를 수행 중인 건설사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언제 어디서 파이프가 나올지 몰라 초긴장 상태”며 “어쩔 수 없이 파이프들을 부수면서 터널을 뚫고 나가야 하는데, 점점 분쟁 건수가 늘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본궤도에 오른 GTX 사업에선 지열 파이프나 지하수 관정 파손 문제가 더 심각하리라는 관측이다. GTX는 수직 파이프류가 몰려 있는 도심지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서울의 한 대심도 지하도로(평균 심도 60m) 공사 현장에서 수평 굴착 도중 위 건물로부터 수직으로 내려진 지열 파이프(길이 150m) 다발의 중간 부분을 파손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 한양대 공학대학원 건설관리학과]

지난 겨울 서울의 한 대심도 지하도로(평균 심도 60m) 공사 현장에서 수평 굴착 도중 위 건물로부터 수직으로 내려진 지열 파이프(길이 150m) 다발의 중간 부분을 파손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 한양대 공학대학원 건설관리학과]

정부 지하 정보 제공 부실
교수들은 “정부 부처끼리 정보 공유 노력이 부족한 게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예를 들면 지열 냉·난방 독려 정책(산업부)과 대심도 지하개발 정책(국토교통부)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추진한 결과 지열 파이프 정보가 모이지 않았다.

심지어 국토부 쪽에선 ‘대심도에는 수직 파이프류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엿보인다. 한국감정원은 지난달 25일 ‘GTX-A 본격 추진’ 보도자료를 내며 “GTX-A는 대심도에 건설되기 때문에 지하 매설물이나 지상부 토지 이용에 대한 영향이 없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수직 파이프류 정보는 대심도 지하개발을 수행하는 업체들에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고 교수들은 지적한다.

정보가 부족하니 설계업체는 설계도에 수직 파이프류를 사실상 빠뜨릴 수밖에 없다. 이 설계도를 건네받은 건설사는 터널을 뚫다 의도치 않게 사고를 낸다는 것이다.

국토부 공간정보진흥과는 지하 파이프류 등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2015년부터 전국의 지하 공간 통합 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까지 완성하겠다”던 계획은 내년 이후로 지연됐고, 교수들이 가장 문제로 삼는 지열 파이프 정보는 구축 대상에서 빠져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파이프 피하려면 지하 200m로 들어가야
김재준 교수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고 제안한다. 그는 “대심도 공사 노선의 주변 건물에 한정해서라도 수직 파이프류의 정확한 개수와 심도, 좌표 등의 정보를 종합 분석해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며 “GTX의 경우 수직 파이프류를 피하기 위해 현재 지하 50m 수준인 심도를 150~200m가량까지 늘여야 할 수 있다”고 했다. 시민들이 GTX를 이용하기 위해 지하 200m까지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다른 전문가도 비슷한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김상효 연세대 토목과 교수는 “대심도 개발 주변의 건물주들은 수직 파이프류 설치 현황을 면밀하게 점검하고 미신고한 부분이 있으면 관청에 알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보완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관계자는 “검토해 볼 만한 좋은 지적들”이라며 “근본적 대안으로는 지하 공간 통합 지도를 서둘러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토부(도로정책과·철도투자개발과)는 “대심도 지하개발 과정에서 수직 파이프와 저촉이 없도록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한 GTX-A에 대해선 "노선 주변을 중심으로 지열 파이프 등의 매립 현황을 정확히 재조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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