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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프로포즈 받은 쑹메이링의 첫 마디는?

중앙일보

입력

중화민국 초대 총통 장제스(蒋介石 장개석, 1887-1975)는 중국 저장(浙江)성 펑화(奉化) 사람이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1949년 12월 타이완으로 옮겨갔지만, 그가 나고 자란 펑화에는 생가와 별장, 장씨 가문 고택 등 곳곳에 장제스의 자취가 남아있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 장제스의 고향 저장성 펑화 #장씨 고가, 여름 별장 등에 담긴 장제스의 발자취

장제스가 장쉐량(张学良)을 감금했던 쉐더우산, '세기의 커플'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러브 스토리가 담긴 별장까지...이처럼 많은 사연을 품은 장제스의 고향을 차이나랩이 직접 다녀왔다.

쑹메이링 [사진 차이나랩]

쑹메이링 [사진 차이나랩]

**쑹메이링(宋美龄):
장제스의 부인, 저장성 재벌 쑹(宋)씨 가문의 세자매 중 막내. 미국 웨슬리 대학을 졸업한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결혼 후 그의 통역이자 대미 외교 지원군으로 활약했다. 쑹메이링의 큰언니 쑹아이링(宋霭龄)은 대재벌이었던 쿵상시(孔祥熙), 둘째 언니 쑹칭링(宋庆龄)은 쑨원(孫文)과 결혼해 각각 '돈' '나라' '권력'을 사랑한 쑹 씨 세자매로 이름을 떨쳤다.

장제스가 나고 자란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宁波)시 펑화(奉化) 시커우(溪口)현.

한 때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컨트롤 타워기도 했던 이곳은 장제스의 출생지이자 장씨 가문의 보금자리로 알려져 있다. 여름 별장 '먀오가오타이(妙高台)' 가 자리잡은 쉐더우산(雪窦山), 쑹메이링과 함께 생활했던 '원창거(文昌阁)', 장씨 가문 고택 등 장제스의 발자취를 차례로 따라가봤다.

원창거(文昌阁 문창각)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시커우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원창거(文昌阁 문창각)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함께 머물던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생전 모습을 따라한 '가짜 장제스'가 방문객을 반겨준다.

원창거는 청나라때 세워졌던 것을 지난 1924년 500제곱미터 면적의 2층집으로 복원, 장제스의 개인 별장 겸 도서관으로 사용했던 장소다. 1927년 쑹메이링과 결혼 한 후 이곳에서 많이 머물렀던것으로 알려져있다.

쑹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 사진 [사진 차이나랩]

쑹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 사진 [사진 차이나랩]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세기의 커플이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가문의 만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들의 사랑은 소위 말하는 불륜이었다. 장제스가 쑹메이링을 만났을 때 이미 유부남이었던 것.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네번째 부인이다.)

쑹메이링은 결혼하자는 장제스의 프로포즈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인을 모두 내보내면, 그 집에 들어가겠어요."

쑹메이링의 요청으로 만들었다는 서양식 상수도 시설 [사진 차이나랩]

쑹메이링의 요청으로 만들었다는 서양식 상수도 시설 [사진 차이나랩]

장제스는 그녀의 말대로 두번째 부인인 야오즈청(姚治诚)을 돌려보내고, 셋째 부인 천제루(陈洁如)는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첫째 부인 마오푸메이(毛福梅)와 이혼 수속을 밟은 다음 쑹메이링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이후 유일하게 마오푸메이만 장씨 가문 본가에 계속 머물렀는데, 장제스와 사이에 아들(장징궈 蒋经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금의 원창각은 1939년 12월 12일 일본의 폭격으로 인해 훼손됐다가 1987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원창거 앞 우뚝 서있는 건축물. 높다란 형상에 종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지만 알고보니 상수도 시설이었다. 해외 유학파인 쑹메이링이 서양식 상수도 시설을 원했다고 한다. 내부를 보면 욕실 역시 서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시절 독일에서 수입해 온 욕조와 변기를 사용해 만들었다.

장씨 가문 고택(蒋氏故居 장씨고거)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당시 장제스의 부와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장씨 가문의 저택에서도 체감할 수 있었다.

집의 크기도 물론이거니와 정원의 넓이가 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현지 안내원은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아궁이의 화로가 세개인 것도 그 증거라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장제스는 부모님을 지극히 섬기는 효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의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유독 비좁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전족을 해서 발이 작은 어머니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한 장제스의 세심한 배려가 담긴 의도된 설계라고 한다.

장씨 고가 [사진 차이나랩]

장씨 고가 [사진 차이나랩]

한 시대를 풍미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옮겨가 생활하다 1975년 4월 5일 88세로 사망했다. 이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쑹메이링은 2003년 10월 10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생전에 죽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는 장제스, 그러나 양안 간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장제스의 유골은 아직까지 타이완에 잠들어 있다.

여름 별장(妙高台 먀오가오타이)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여름 별장 '먀오가오타이' [사진 차이나랩]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여름 별장 '먀오가오타이' [사진 차이나랩]

"자본주의의 흔적을 보러 가자!"

먀오가오타이를 찾아가는 길, 중국 친구들은 이같이 말했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여름 별장으로 알려진 먀오가오타이는 쉐더우산 산중에 위치해 있다. 등산 코스에 이어 케이블카까지 타고 이동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먀오가오타이 내부 [사진 차이나랩]

먀오가오타이 내부 [사진 차이나랩]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먀오가오타이 앞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바위에 걸터 앉아 있길 즐겼다고 한다.

바로 그 위치에 서보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왜 이곳을 여름 별장으로 활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실제 여름에 섭씨 40도까지 올라가는 지역이지만, 이곳 먀오가오타이는 기온이 10도 이상 낮아 '피서'에 제격이었다고 한다. 장제스 쑹메이링은 이 곳에서 가슴이 확 트이는 풍광을 만끽했을 것이다.

먀오가오타이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진 차이나랩]

먀오가오타이에서 내려다본 풍경 [사진 차이나랩]

해발 396m에 솟은 먀오가오타이. 케이블카를 타더라도 여름날 땀을 흠뻑 적시는 등산길을 걸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이곳에 그 시절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어떻게 드나든 것일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렸다. 가마를 타고 올라간 것.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먀오가오타이를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 때마침 생수 짐을 어깨에 지고 올라오는 노인을 마주쳤다. 양 옆에 생수를 들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당시 장제스-쑹메이링을 어깨에 지고 올라갔던 가마꾼의 노고도 함께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폭포: 첸장옌(千丈岩)과 싼인탄(三隐潭)

첸장옌 폭포 [사진 차이나랩]

첸장옌 폭포 [사진 차이나랩]

장제스의 여름 별장 먀오가오타이는 쉐더우산이 자랑하는 첸장옌(千丈岩) 폭포, 싼인탄(三隐潭 삼은담)과도 이어진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인지 곳곳에서 한국어 표지판이 보였다.

첸장옌 폭포는 이름 그대로 천장(千丈), 즉 '천길' 폭포라는 뜻,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정말 천길 낭떠러지로 수직 하강하는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다.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싼인탄(三隐潭 삼은담)은 그 글자 뜻을 풀어보면 '세개의 숨어 있는 못'이라는 의미다.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돌면 '짠'하고 나타나는 물줄기.

위에서부터 아래로 상인탄(上隐潭), 중인탄(中隐潭), 하인탄(下隐潭)을 순서대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사진 차이나랩]

초여름 햇볕이 쨍쨍한 날씨였지만 산 속 수풀이 우거지고 지칠 때쯤 나타나는 물줄기의 선선함으로 더위를 달랠 수 있었다.

한편, 장제스의 고향 펑화 시커우는 복숭아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방문 당시 아직 시기가 일러 기회를 놓쳤지만 6월-7월에 방문하면 제철 복숭아의 풍부한 과즙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외 특산물로는 토란과 첸청빙(千层饼) 등이 있다.

왼쪽부터 복숭아, 첸청빙, 토란 [사진 바이두 바이커]

왼쪽부터 복숭아, 첸청빙, 토란 [사진 바이두 바이커]

저장 닝보=차이나랩 홍성현

[사진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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