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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패싱, 그 후 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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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벚꽃 잎이 초속 10㎝로 흩날리던 지난해 4월, 일본의 한 신문 만평이 눈길을 끌었다. 동북아 6개국 정상이 벚꽃 잎으로 묘사됐는데, 그 가운데 아베 신조 총리의 꽃잎만 꽃대에서 홀연히 떨어지고 있었다. 1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아베 총리만 외톨이처럼 떨어져나가는 모습이었다. 일본만 북한 비핵화 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는 현실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 지금 상황은 어떤가. 여전히 아베 총리는 관계국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지 못한 유일한 정상이다. 물밑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조건없이 만나자”는 러브콜에 북한은 여전히 답을 않고 있다. 그런데 북한과 멀어진 건 아베 총리 뿐만이 아니다. 북한 관계에 올인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북·미관계가 교착된 뒤, 설 땅이 좁아진 상태다. 떨어진 꽃잎은 아베 총리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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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들리는 소식으로는 북한 지도부는 이제 아예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별개로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외교분야의 전면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대외관계를 총괄했던 김영철 부위원장이 통일전선부장 자리에서 물러난 게 그 결과다. 김 부위원장의 휘하에서 한 몸처럼 움직였던 외무성과 통전부가 분리됐다는 걸 의미한다.

1년전 “남·북·미가 양 수레바퀴처럼 함께 굴러가고 있다”(대북소식통) 고 했지만, 이제는 남북과 북·미가 전혀 다른 수레를 끌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는 북·미관계에 더 이상 한국이 낄 자리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 수시로 친서가 오갈만큼 직접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말라”는 말이 나온 배경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한 소식통은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는 지난 4월 11일 미국 방문이었다고 전했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논의하러 간 문 대통령에게 크게 실망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국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데 배짱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대화 동력을 살리긴커녕 북·미 양쪽에서 미운털이 박힌 셈이다. 중재자 외교의 험난한 일면이다.

벚꽃에 이제 누가 남아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짜피 꽃잎은 시간이 지나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 다음이 문제다. 시진핑 주석이 20일 방북까지 하면서 각국 정상들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중재자 외교, 촉진자 역할도 차분하게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