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공산당 '錢국구' 후보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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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2월 총선을 앞두고 러시아 공산당이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이달 초 공산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확정한 공천의원 후보 명단에 '노동자 계급의 적이자 타도 대상'이어야 할 대자본가들이 대거 포함됐기 때문이다. 1993, 95, 99년 선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일부 의원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 선거법은 지역구 의원 외에 지지 정당에 대한 투표를 해 5% 이상을 득표한 정당에 득표비율별로 전국구 의원수를 할당하는 '정당명부 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바로 이 정당명부 투표 의원 후보로 대기업인들이 공천을 받은 것이다.

당선 가능성이 가장 큰 18명의 중앙그룹 명단에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사의 간부인 퇴역 장성 알렉세이 콘다우로프가 13번 후보에 올랐고, 역시 같은 회사 이사 세르게이 무라블렌코가 14번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대규모 투자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겐나디 세미긴도 18번을 받았다. 특이한 점은 세명 모두 전당대회에서 '비밀투표' 결과로 공천받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세미긴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표자'로 통하는 유명한 노동자 출신 의원 바실리 샨디빈을 물리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노동자 출신은 한명도 선출되지 않았다. 그 밖에 2백50여명에 이르는 지방별 '전국구' 후보 명단에도 기업인들이 상당수 진출했다. 공산당이 "사유화 과정에서 나라를 약탈한 노동인민의 적"이라며 비난해 마지 않던 바로 그 올리가키(신흥 재벌)들이다.

이에 대해 일부 '골수'공산당원들은 "공산당이 노동자들의 당이 아니라 자본가 당으로 변해 가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비상총회를 열어서라도 '계급의 적'들을 후보 명단에서 몰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크렘린의 지원을 받으며 막대한 자금력으로 선거를 주도하는 여당의 공세에 맞서 총선을 치르려면 돈줄을 쥔 기업인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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