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로마의 정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28일 이탈리아는 암흑에 휩싸였다. 이날 오전 3시(현지시간)부터 10시간 이상 로마.밀라노 등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 대규모 정전사태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물론 통신까지 마비되면서 로마는 2천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대형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프랑스 파리 시장과 이명박 서울시장이 동시에 로마를 방문하고 있었다. 특히 로마와 파리는 이날 자매결연을 하고 밤 새도록 도심에서 백야(白夜)축제를 벌이던 중이었다. 축제를 즐기던 시민들은 가로등마저 꺼져 칠흑 같은 거리를 더듬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탈리아는 1987년 국민투표를 통해 작동 중이던 원자력발전소 4개의 운행을 모두 중단했다. 건설 중이던 5개는 공사를 중단해 버렸다. 체르노빌 원전 사건의 뒤끝이었다. 국민투표에 의한 원전의 운행 중단은 원래 5년간 한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정부는 한술 더 떴다. 운행 중단 기한을 무기 연장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원전의 추가 건설은 아예 생각조차 못할 일이 됐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현재 전력 수요의 14% 정도를 스위스.프랑스 등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다. 이중 프랑스에서 공급하는 전력은 전체 수입량의 17% 정도다. 대규모 정전 사태는 프랑스와 연결된 대형 송전선이 먹통이 되면서 일어났다.

한 이탈리아인은 "(이번 정전은) 부끄러운 일이다. 80년대의 좌익 정당들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이 금지됐고, 지금 다른 나라 전기를 사서 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정전 사태는 에너지 수급정책이 정치에 휘말려 철저한 장단기 계획 수립이나 집행을 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원전의 추가 건설과 폐기물 처리장 부지를 둘러싼 국내의 논란이 건설적으로 매듭지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이철호 메트로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