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노인(愚公)이 산을 옮겼다(移山)’는 전국시대, 열자(列子)가 전했다는 고사다. 사람의 의지를 강조하기로는 가히 공전절후(空前絶後)다. 우공은 집 앞에 길을 내고 싶었다. 산 두 개가 가로막아 불편했다. 돌을 옮겼다.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다. 주변에서 손가락질하자 “대대손손 옮기겠다”고 했다. 이 무모함에 상제(上帝)가 졌다. 산신을 시켜 산을 옮기도록 했다. 열자라고 이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정신의 힘을 말하려고 남겼을 것이다. 나는 이 오래된 얘기에서 오늘의 기업가 정신을 본다. 효율·목표·욕심을 엔진 삼아 불가능이 가능이 될 때까지 두드리는 집념이 그것이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듯 #50년 주세법에 무모한 도전 #이런 게 기업가 정신 아니겠나
1년쯤 끌어온 정부의 주류세 개편 과정에 단연 눈길을 끈 사람이 있다. 한국판 우공, 조태권 광주요 회장이다. 그는 ‘주세법의 역사’로 불린다. 50년 묵은 주세법을 이번에 일부나마 뜯어고치게 된 데는 그의 공이 크다. 그는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에 2013년부터 14차례, 관련 부처까지 합하면 40여 차례 민원을 냈다. 답변을 제대로 못 들으면 재차, 삼차 질문했다. 기재부 세제실을 거쳐 간 관료라면 조태권 이름 석 자를 모를 수 없다. 조 회장의 주장은 딱 하나였다. “술에 붙는 세금을 종량세로 바꿔달라”
우리 주세법은 세금이 알코올 양(도수=종량세)이 아니라 가격에 좌우되도록 했다. 이른바 종가세다. 원가가 싼 술이 세금도 싸다. 비싸고 좋은 재료·디자인·품질의 술일수록 더 많은 세금이 붙고 더 비싸지는 구조다. 세계적 명주가 된 마오타이는 물론, 산토리 위스키조차 나오기 힘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종가세를 적용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멕시코·터키·칠레·이스라엘 딱 다섯이다. 공통점이 있다. 도수 높은 술이 국민주다. 한국의 소주, 멕시코의 테킬라, 터키의 라크, 칠레의 피스코는 모두 독주다. 종가세를 종량세로 바꾸면 국민주 가격이 뛴다. 한국에선 ‘소주=서민의 술’이다. 역대 정부가 “표심이 흔들릴 휘발성 강한 이슈”라며 반대해 온 이유다.
조 회장이 꼽는 종량세 효과는 무궁무진하다. 술 소비를 줄이고, 명품 술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며, 한식 세계화는 물론 국내 산업지도를 새롭게 그릴 수 있다. 싼 맛에 집 나갔던 술 공장들이 국내로 돌아오고 고용이 늘 것이며 국산 재료와 곡물의 수요도 늘게 된다. 손톱 밑 가시도 못 뽑는 갈라파고스의 나라, 규제 천국이란 오명을 벗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이달 초 정부가 확정한 주세법 개편안은 맥주와 탁주에만 종량세를 적용하도록 했다. 소주와 다른 주종은 훗날 논의하기로 했다. 조 회장은 “시늉만 낸 땜질식 대응”이라며 불만이 크다. 그래도 소득은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종량세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했다. 김낙회 전 세제실장은 “이번 주류세 개편은 정책의 무게를 종량세에 달아보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조태권 회장이 주세법에 꽂힌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다. 2005년 출시한 화요 때문이었다. 술은 출고와 동시에 세금부터 내야 한다. 안 팔리면 재고와 세금 부담, 이중으로 손해다. 주변에선 “1년 안에 망한다”고 했다. 그래도 버텼다. 2년이 지나자 그는 “법을 안 바꾸면 진짜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방법을 찾고 공부를 시작했다. 술 장인, 산업, 세계 시장, 소비… 모든 걸 따져봐도 결론은 종량세였다.
그때부터 그는 종량세 전도사가 됐다. 한결같은 14년이 흘렀다. 마침내 철옹성 같던 종가세에 금이 가고, 종량세의 첫발을 뗐다. 한 기업인이 효율·목표·욕심을 엔진 삼아 끝없이 두드린 결과다. 언젠가는 그의 바람대로 소주도 종량세로 바뀔 것이다. 그때 강호가 이를 일러 ‘화요개법(改法:화요가 법을 바꿨다)’이라고 할지 ‘조태권개법(조태권이 법을 바꿨다)’이라고 할지는 알 수 없다. 하기야 이름이 무슨 대수랴, 세상을 바꾸는 정신의 힘,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