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화요개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리석은 노인(愚公)이 산을 옮겼다(移山)’는 전국시대, 열자(列子)가 전했다는 고사다. 사람의 의지를 강조하기로는 가히 공전절후(空前絶後)다. 우공은 집 앞에 길을 내고 싶었다. 산 두 개가 가로막아 불편했다. 돌을 옮겼다.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다. 주변에서 손가락질하자 “대대손손 옮기겠다”고 했다. 이 무모함에 상제(上帝)가 졌다. 산신을 시켜 산을 옮기도록 했다. 열자라고 이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정신의 힘을 말하려고 남겼을 것이다. 나는 이 오래된 얘기에서 오늘의 기업가 정신을 본다. 효율·목표·욕심을 엔진 삼아 불가능이 가능이 될 때까지 두드리는 집념이 그것이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듯 #50년 주세법에 무모한 도전 #이런 게 기업가 정신 아니겠나

1년쯤 끌어온 정부의 주류세 개편 과정에 단연 눈길을 끈 사람이 있다. 한국판 우공, 조태권 광주요 회장이다. 그는 ‘주세법의 역사’로 불린다. 50년 묵은 주세법을 이번에 일부나마 뜯어고치게 된 데는 그의 공이 크다. 그는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에 2013년부터 14차례, 관련 부처까지 합하면 40여 차례 민원을 냈다. 답변을 제대로 못 들으면 재차, 삼차 질문했다. 기재부 세제실을 거쳐 간 관료라면 조태권 이름 석 자를 모를 수 없다. 조 회장의 주장은 딱 하나였다. “술에 붙는 세금을 종량세로 바꿔달라”

우리 주세법은 세금이 알코올 양(도수=종량세)이 아니라 가격에 좌우되도록 했다. 이른바 종가세다. 원가가 싼 술이 세금도 싸다. 비싸고 좋은 재료·디자인·품질의 술일수록 더 많은 세금이 붙고 더 비싸지는 구조다. 세계적 명주가 된 마오타이는 물론, 산토리 위스키조차 나오기 힘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종가세를 적용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멕시코·터키·칠레·이스라엘 딱 다섯이다. 공통점이 있다. 도수 높은 술이 국민주다. 한국의 소주, 멕시코의 테킬라, 터키의 라크, 칠레의 피스코는 모두 독주다. 종가세를 종량세로 바꾸면 국민주 가격이 뛴다. 한국에선 ‘소주=서민의 술’이다. 역대 정부가 “표심이 흔들릴 휘발성 강한 이슈”라며 반대해 온 이유다.

조 회장이 꼽는 종량세 효과는 무궁무진하다. 술 소비를 줄이고, 명품 술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며, 한식 세계화는 물론 국내 산업지도를 새롭게 그릴 수 있다. 싼 맛에 집 나갔던 술 공장들이 국내로 돌아오고 고용이 늘 것이며 국산 재료와 곡물의 수요도 늘게 된다. 손톱 밑 가시도 못 뽑는 갈라파고스의 나라, 규제 천국이란 오명을 벗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이달 초 정부가 확정한 주세법 개편안은 맥주와 탁주에만 종량세를 적용하도록 했다. 소주와 다른 주종은 훗날 논의하기로 했다. 조 회장은 “시늉만 낸 땜질식 대응”이라며 불만이 크다. 그래도 소득은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종량세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했다. 김낙회 전 세제실장은  “이번 주류세 개편은 정책의 무게를 종량세에 달아보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조태권 회장이 주세법에 꽂힌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다. 2005년 출시한 화요 때문이었다. 술은 출고와 동시에 세금부터 내야 한다. 안 팔리면 재고와 세금 부담, 이중으로 손해다. 주변에선 “1년 안에 망한다”고 했다. 그래도 버텼다. 2년이 지나자 그는 “법을 안 바꾸면 진짜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방법을 찾고 공부를 시작했다. 술 장인, 산업, 세계 시장, 소비… 모든 걸 따져봐도 결론은 종량세였다.

그때부터 그는 종량세 전도사가 됐다. 한결같은 14년이 흘렀다. 마침내 철옹성 같던 종가세에 금이 가고, 종량세의 첫발을 뗐다. 한 기업인이 효율·목표·욕심을 엔진 삼아 끝없이 두드린 결과다. 언젠가는 그의 바람대로 소주도 종량세로 바뀔 것이다. 그때 강호가 이를 일러 ‘화요개법(改法:화요가 법을 바꿨다)’이라고 할지 ‘조태권개법(조태권이 법을 바꿨다)’이라고 할지는 알 수 없다. 하기야 이름이 무슨 대수랴, 세상을 바꾸는 정신의 힘,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