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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득보다 실이 컸던 대통령의 ‘장학썬’ 수사 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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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검찰과 경찰의 현 지도부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특권층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었다. 청와대가 지목한 것은 장자연·김학의·버닝썬(‘장학썬’) 사건이었다. 그 뒤 지지부진하던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경찰의 버닝썬 사건 수사팀이 확대됐다. 그 뒤 석 달, 결과는 초라하다. 장자연 사건은 재수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김학의 사건은 김 전 차관 구속으로 이어졌으나 본래의 문제였던 성범죄는 온데간데 없고 뇌물 범죄로 방향이 바뀌었다. ‘별건 수사’의 성격이 짙다. 버닝썬 사건도 특권층 비호 의혹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략적 효과 얻었을지 모르나 대통령 권위는 훼손 #독립적 수사 진짜 원한다면 개별 사건 언급 삼가야

장자연·김학의 사건을 어느 정도 아는 법조인들은 청와대 움직임을 걱정했다. 대통령 지시로 법무부와 검찰이 과잉 대응하며 절차적 정의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고, 재수사를 한다 해도 결과가 본질적으로 달라지기 힘든 사안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됐다. 검경이 열심히 뛰었는데도 새로 드러난 범죄 사실은 거의 없다. 윤지오라는 배우가 등장해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갖가지 주장을 했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드물다. 김학의 사건은 ‘별장 성폭행’ 여부가 핵심이었는데, 여전히 실체를 모른다는 게 검찰 설명이다. 진상을 규명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무색해진 상황이다.

결과가 이처럼 허망하지만, 청와대는 대통령이 국민 공분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전 정권 핵심 인사나 특정 언론사에 충격을 주고 힘을 빼는 효과를 얻었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다. 첫째, 대통령의 권위가 상처를 입었다. 앞서 문 대통령이 수사를 독려한 ‘서울중앙지검장 격려금’ 사건과 ‘박찬주 대장’ 사건도 사실상 무죄로 판명이 났다. 둘째, 조국 민정수석 등 대통령 참모진의 무능이 드러났다. 김학의·장자연 사건 내용을 제대로 살펴봤다면 공소시효나 증거 확보 문제 때문에 재수사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청와대 참모 또는 법무부 간부에겐 대통령 말의 무게를 깎아내린 책임이 있다. 셋째, 인치(人治)에 의해 법치(法治)가 훼손됐다. 과거사위는 사실로 입증되지 않은 진술을 공개해 관련자들의 명예를 훼손했고, 법무부와 검찰은 김 전 차관에 대한 초법적 출국금지 등의 무리한 조치로 구태를 드러냈다.

대통령이 수사·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 게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최고 인사권자의 의중이 드러나는 순간 수사 흐름이 바뀌고 수사 담당자가 과잉 또는 축소의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치권자가 검찰과 경찰이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수사를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르고 결과를 지켜보는 인내를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