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ㆍ소비 꺾였는데 5개월째 0%대 물가 상승…‘디플레’ 고개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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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개월째 0%대에 머물렀다. 수출이 줄고, 민간 소비가 꺾인 상황에서 수요가 부진해 맞는 저(低)물가 시대라 반길 수만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통계청이 4일 발표한 ‘5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물가는 전년 같은 달보다 0.7% 오르는 데 그쳤다. 올해 들어 5개월 연속 0%대다. 지난해 연간 1.5%였던 물가 상승률은 올 1월 0.8%로 떨어진 데 이어 2월(0.5%)→3월(0.4%)→4월(0.6%)→5월(0.7%) 0%대로 눌러앉았다. 물가 상승률이 5개월 연속 0%대를 유지한 건 2015년 2월∼11월(10개월) 이후 처음이다. 2015년엔 국제유가 급락과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겪었다. 1~5월 누계 상승률은 0.6%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5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폭염ㆍ가뭄으로 급등했던 채소류 가격은 지난달 9.9% 떨어졌다. 전체 물가를 0.15%포인트 끌어내리는 역할을 했다. 수산물도 1년 전보다 1.3% 하락해 전체 물가를 0.02%포인트 끌어내렸다. 반면 축산물은 2.6% 올라 전체 물가를 0.06%포인트 밀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석유류는 국제유가 하락과 정부의 유류세 인하로 전년 같은 달보다 1.7% 하락했다. 전체 물가를 0.08%포인트 끌어내렸다. 지난달 유류세 인하 폭을 축소하면서 석유류 가격 하락 폭이 전월보다 줄었지만, 1년 전보다는 여전히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의 무상복지 확대도 물가 안정에 영향을 미쳤다. 무상교육 확대로 남자학생복(-44.3%)과 여자학생복(-41.9%), 학교급식비(-41.3%) 물가가 40% 이상 떨어졌다. 건강보험 확대로 병원검사료(-7.3%), 입원진료비(-1.7%) 등도 하락세를 보였다.

반면 서비스 물가는 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지난달 0.8% 올라 전체 물가를 0.45%포인트 끌어올렸다. 하지만 지난달 서비스 물가 상승 폭은 외환위기 파장이 몰아쳤던 1999년 12월(0.1%) 이후 거의 20년 만의 최저치다. 전반적으로 안정세란 얘기다. 집세(-0.1%)와 공공서비스(-0.2%) 물가가 하락한 가운데 외식(1.9%) 등 개인 서비스 물가는 1.5% 올랐다.

물가 상승률이 전례 없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단순 저물가가 아니라 ‘경기 침체와 맞물린’ 지속적인 물가 하락을 뜻한다. 경제가 활기를 띠면서 물가가 안정세를 보인다면 바람직하지만, 현재 저물가 기조는 이와 다르다. 경제 활력이 떨어지면서 민간 소비와 기업 투자 등 내수 부문 총수요가 크게 위축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라서다.

이미 한국 경제는 생산ㆍ투자ㆍ소비가 줄면서 1분기 경제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0.4% 하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4분기 이후 1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우리 경제성장을 이끄는 수출 역시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6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3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주요 20개국(G20) 상품 교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올 1분기 수출은 1386억 달러(계절 조정치ㆍ경상가격)로 전년 동기 대비 8.1% 감소했다. G20은 물론 OECD 회원국 중에서도 가장 큰 감소 폭을 기록했다.

양서영 KDB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 연구원은 지난 4월 ‘최근 저물가 원인 및 동향’ 보고서에서 “세계적으로 저물가 흐름이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ㆍ인도네시아 등 주요 신흥국뿐 아니라 미국ㆍ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이라며 “수출과 설비투자 감소, 가계부채 증가, 소비 둔화 같은 내수부진에 의한 물가하락 압력이 지속할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어 “경기가 하강하는 국면에서의 저물가는 소비와 투자를 지연시켜 경기둔화를 심화시킬 수 있으므로 내수부진을 방지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디플레이션에 대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최근 물가 상승률 둔화는 수요가 아닌 공급 쪽 요인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정통적인 디플레이션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김윤성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정의로는 소비자물가가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해야 디플레이션이라고 한다”며 “복지 정책이나 석유류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 영향을 제외하면 디플레이션 우려는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앞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4월 “성장전망, 물가, 금융안정 상황 등을 짚어볼 때 지금 기준금리 인하를 검토해야 할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은 작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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