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탈출의 확산이 우려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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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세계 3위의 높은 이혼율, 이민 상품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 급증하는 조기유학, 원정출산의 열풍. 요즘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미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이러한 현상들은 실제로는 가정.사회.국가에 대한 구성원들의 단적인 거부감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심히 우려되는 것들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문제가 있을 때, 설사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면으로 부닥쳐 해결하기보다 회피하고 외부로 탈출함으로써 해결방안을 찾고자 하는 점에 있다.

*** 과거와 확 다른 문제해결 방식

경제학자 허쉬만(Hirschman)에 의하면 가정.기업.국가를 막론하고 그 구성원이 불만을 가질 때 이들은 내부에서의 '항의' 아니면 외부로의 '탈출'을 선택하게 된다. 경제영역에서는 통상 번거로운 항의보다 탈출이 선호된다.

한 기업의 제품에 불만을 가진 소비자는 굳이 그 기업에 항의하기보다 다른 기업의 더 나은 제품을 구입하는 탈출행위를 선택한다. 반면 사회나 국가가 불만의 대상일 때는 탈출보다 항의가 일반적으로 선택된다. 탈출의 비용이나 대상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항의와 탈출이 반드시 상호 배타적인 문제해결 방식은 아니다. 우선은 항의를 통해 불만을 해소하려 하고 그것이 어려울 때 탈출을 선택하는 것도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식이다.

구대륙의 핍박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들에 의해 건설된 미국에서는 탈출이 매우 자연스러운 가치관으로 여겨져 왔다. 미국 사회의 잦은 이직.이주.이혼 등은 이러한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탈출의 선택이 그다지 용이하지 않았고 설혹 탈출이 가능하더라도 문화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 여겨져 왔다. 탈출은 현실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라는 비판에서부터 심지어 배반 혹은 배신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문제해결 방식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상대방과의 골치 아픈 대면을 필요로 하는 항의보다는 등을 돌리면 그만인 탈출에 대한 선호현상이다. 여기에는 정(情)도, 아쉬움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이 제품에서 저 제품으로 손쉽게 바꾸는 식의 메마른 행위만이 존재한다.

심각한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탈출이 일부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라는 점이다. 조기유학과 원정출산은 상당한 경제적 비용을 요하고 따라서 탈출을 선택할 수 있는 부류는 이 사회의 중상류층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부를 자신의 문제해결에 쓰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정작 문제는 이들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과 경제적 부가 우리 내부의 문제해결에 쓰이지 않고 외부로 유출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될 때 탈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를 뒤로 한 채 외부로 떠나고 대다수의 힘없는 사람만 내부의 모순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실의 악순환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모두의 힘이 합쳐져도 해결될까 말까한 문제가 산적한 우리 사회로서는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탈출선호 현상이 문제해결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감소시킴으로써 정부의 개선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탈출의 증가로 인해 항의의 목소리가 줄어들어 마치 문제가 없는 사회처럼 보여질 수 있고, 이는 정부로 하여금 문제해결과 책임을 회피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내부 모순 껴안고 사는 약자들

뿐만 아니라 탈출의 기회는 항의에 따른 각종 곤란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탈출을 더욱 자극하고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탈출현상의 심화는 단순히 사회적 위화감의 조성이나 갈등의 확산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궁극적으로 한 사회의 해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탈출의 결과로 생겨난 국적 불분명의 찰스와 서니의 마음 속에 그려지는 대한민국과, 광화문에서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철수와 선희의 대한민국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골치 아픈 항의의 과정보다 손쉬운 탈출을 선택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단순한 기우로 끝나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철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