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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규철의 남극일기]“24시간 영하 40도 속 칠흑같은 밤…아파도 후송불가

중앙일보

입력

남극대륙 장보고과학기지에서 본 5월 극야의 하늘과 오로라. [사진 극지연구소]

남극대륙 장보고과학기지에서 본 5월 극야의 하늘과 오로라. [사진 극지연구소]

⑨ 극야(極夜)의 남극기지

 어느덧 해가 짧아지더니 바다 너머로 해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극야(極夜)가 찾아왔다. 정말 하얗게 빛나던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바뀌었다. 장보고과학기지의 본관동에서 발전동과 취수구까지 이어지는 가로등은 극야의 어둠과 눈보라에 뒤섞여 희미하다. 본관동에서 연구동으로 가는 길은 우주 관측을 위해 빛이 차단되도록 소등하였다. 극야 기간에는 당직이나 안전 점검을 위한 발전동 나들이 이외는 모든 외출이 금지된다. 극지 사고 중 약 30%가 낙상으로 인한 골절이다. 기지 주변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 어두운 곳에서 미끄러지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의 남극기지‘돔 후지’의 일상을 코믹하게 보여준 영화‘남극의 쉐프’(1997년)를 보면, 극야 속 남극의 생활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속 돔 후지엔 인터넷도 없고 전화 연결도 쉽지 않다. 8명의 대원 중에는 극야 기간에 무기력해면서 이상 정신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먹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여기고 월동기간을 힘겹게 견뎌낸다.

우울증과도 싸워야하는 남극기지 대원들

장보고기지는 영화 속 돔 후지처럼 세상과 완전하게 고립된 상태는 아니다. 한국의 자랑인 인터넷이 훌륭해 외부 지인들과 언제든 화상통화를 할 수 있고 사이버 세상에서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좁은 환경에서 근무와 생활 리듬을 맞추기 위해서는 운동이 절실한데, 컴퓨터 화면에 빠지다 보면 잠도 오지 않고 아침 기상으로 시작되는 근무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초속 30m 이상의 강풍이 부는 날이 많아지면서 흔들리는 건물 소리에 민감한 대원들은 숙면을 취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귀마개를 할 수도 없다. 경계를 위해 항상 비상 대기상태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우울해지는 대원들의 하소연이 늘었다. 일부 대원은 근무 후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으로 극복하기도 했지만, 몇몇 대원들은 우울증세로 항정신성 약물 치료를 받아야했다. 가끔 나도 잠을 이루기 힘들 땐 수면 유도약을 먹어야했다.

장보고기지 내 식당 바. 다양한 종류의 인스턴트 라면이 가득하다. 고립된 지역에서 먹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일본영화 '남극의 쉐프'에서도 돔후지의 기지대장이 월동기간 몰래 끓여먹던 인스턴트 라면이 바닥나면서 힘들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 극지연구소]

장보고기지 내 식당 바. 다양한 종류의 인스턴트 라면이 가득하다. 고립된 지역에서 먹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일본영화 '남극의 쉐프'에서도 돔후지의 기지대장이 월동기간 몰래 끓여먹던 인스턴트 라면이 바닥나면서 힘들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 극지연구소]

음식은 우울증 극복의 일등공신

우울증 극복의 일등공신은 조리대원의 음식이었다. 과거 세종기지 역사에서 조리대원 때문에 대원간 싸움으로 번진 사건도 있었지만, 현재 조리대원 선발의 기본은 한식ㆍ중식ㆍ일식 자격증을 모두 갖춰야 한다. 보급식품 대부분이 냉동상태라 음식 맛을 내기 힘들었지만 이희영 조리대원의 솜씨는 대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가끔 대원들이 먹고 싶은 음식(스테이크ㆍ생선회ㆍ초밥ㆍ삼계탕ㆍ냉면ㆍ콩국수ㆍ수제비 등)을 추천하면 군말 없이 해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매주 수요일 오후는 체육을 하는 날로 만들어 식당에서 배구나 ‘배탁’(배구와 탁구를 결합한 게임)을 하였다. 지는 팀은 그날 저녁 식사 당번이 된다. 금요일 저녁은 일직과 당직자를 제외하고 서로 마음을 푸는 술자리와 노래방으로 어울렸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 생일파티는 그야말로 광란이었다. 마음껏 축하하고 서로 부대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24시간 밤만 계속되는 극야 속 남극대륙에서는 육체적, 심리적 안정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월동대원들이 기지 실내에서 배구를 즐기고 있다. [사진 극지연구소]

24시간 밤만 계속되는 극야 속 남극대륙에서는 육체적, 심리적 안정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월동대원들이 기지 실내에서 배구를 즐기고 있다. [사진 극지연구소]

남극에서 진행된 모의 급성 맹장 수술

우리 5차 월동대에서 가장 잘한 일들 중 하나는 외과전문의인 채병도 의료대원의 월동에 대비한 모의수술이었다. 실제 일반 수술은 집도의를 비롯해 마취의와 3명의 보조 간호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일반 수술이 필요할 경우 의료대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실 미국의 맥머도 기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기지들이 우리와 유사한 상황이다. 3월 말 채병도 의료대원이 우리나라 기지 역사 최초로 급성 맹장염을 가장한 모의수술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 채병도 대원이 마취와 집도를 맡고 사전 교육을 통해 선발된 3명의 대원이 보조간호사를 맡았다. 모의 환자는 실제 마취를 경험했고, 환자 대용 돼지고기 덩어리로 모의 수술을 진행하였다. 혹시나 모를 수술 시행에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기지 의료 사고를 대비한 대안으로 극지의학회에도 보고하였다.

월동기간을 앞둔 2018년 3월 장보고기지의 월동대원 중 한 명인 외과전문의인 채병도 의료대원이 모의수술을 준비했다. 급성 맹장염을 가장한 모의수술이었다. 사전 교육을 통해 선발된 3명의 대원이 보조간호사를 맡았다. [사진 극지연구소]

월동기간을 앞둔 2018년 3월 장보고기지의 월동대원 중 한 명인 외과전문의인 채병도 의료대원이 모의수술을 준비했다. 급성 맹장염을 가장한 모의수술이었다. 사전 교육을 통해 선발된 3명의 대원이 보조간호사를 맡았다. [사진 극지연구소]

 '남극 최고' 미국기지서도 암 진단 대원 후송 늦어 사망  

극야의 한가운데인 6월에 맞은 러시아 월드컵은 칠흑 속 기지생활의 활력소가 됐다. 대원들이 ‘치맥’과 함께 응원전을 펼쳤고 스코어 맞추기 담배내기에 즐거움을 더했다. 한 가지 불행한 일은 6월 말에 류재일 대원이 기상관측동 점검차 외부에 나갔다가 낙상으로 발목 부상을 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복합 골절이 아닌 단순 골절이라 깁스가 모든 걸 해결했지만, 사고 당시 대원 안전을 책임지는 대장으로서 진단이 나오기까지 대장실에서 마음을 졸여야 했다. 큰 부상이라면 도저히 해결할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극야 속 남극기지로 헬기를 보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바다가 두껍게 얼어붙기 때문에 쇄빙선 접근도 안 된다. 수년 전 그렇게 좋다는 미국 맥머도 기지에서 한 여성이 암 진단을 받았는데 결국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해 치료 중 유명을 달리했던 일이 있다.

7월엔 기지 실내에서 ‘남극 올림픽’(종목: 배구ㆍ배탁ㆍ탁구ㆍ족구ㆍ당구ㆍ제기차기ㆍ줄넘기 등)을 했다. 네 팀이 상금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8월 초 어느날 햇빛이 들어오면서 대원들의 얼굴에도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⑩회에 계속

⑩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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