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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교무부장 아버지 마음 속 진실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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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숙명여고 ‘시험답안 유출’ 사건 재판

쌍둥이 딸에게 정기고사 시험 답안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 현OO씨가 지난해 12월 첫 공판을 마친 뒤 서울중앙지법 구치감에서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쌍둥이 딸에게 정기고사 시험 답안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 현OO씨가 지난해 12월 첫 공판을 마친 뒤 서울중앙지법 구치감에서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은 이 사건 각 정기고사와 관련해 시험지나 정답을 유출한 사실이 없고, 피고인의 쌍둥이 딸들과 공모한 사실도 없으며, 딸들이 정답을 암기하고 응시한 사실이 없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 그 성적이 향상됐을 뿐이고….”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 유죄 판결 #“무죄” 주장 거짓말이면 두 딸까지 #거짓의 멍에 지고 살아가게 되는데 #그는 왜 ‘결백’ 입장 굽히지 않는가

판사가 피고인 입장을 설명한 뒤 “결론부터 말하겠다”고 했다. 녹색 수의 차림인 피고인의 시선은 판사를 향해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존재하고, 최소한 (유출된 답안을) 참고했다는 정황이 인정되므로…공소사실 전체가 유죄로 인정됩니다.”

지난주 목요일(23일) 오전 9시 50분. 서울중앙지법 514호 법정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대부분이 노트북을 든 기자들이었다. 피고인은 숙명여고 전 교무부장 현OO(53)씨. 그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딸에게 시험 답안을 유출한 혐의(업무방해)로 구속 기소됐다.

“피고인이 의심스러운 행적(시험 직전 주말 출근 등)을 남긴 점이나 쌍둥이 딸의 성적이 급상승했다는 점만으로 범죄사실이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그러나 피고인 및 변호인의 주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그 주장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사정들에다….”

형사24단독 이기홍 판사는 쌍둥이 딸의 학교 성적이 똑같은 시점(1학년 2학기 중간고사)을 기점으로 단기간에 최상위권으로 올라갔음에도 모의고사 등 다른 성적 지표엔 실력 향상이 감지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이 판사는 결정적 증거로 세 가지 정황을 꼽았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B(작은 딸)는 복잡한 물리문제를 어떠한 풀이과정도 없이 암산하였고, 그 결과가 고득점 또는 만점이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1년 전까지 B는 선천적 천재로 상식의 범위를 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지나 수기 메모장에 평소보다 훨씬 작은 글씨로 적힌 이른바 ‘깨알 정답’도 중요한 정황 증거로 지목했다. 문제의 숫자들은 사전에 유출된 정답을 암기하면서 적거나, 암기했다가 잊을까봐 적어놓은 것이란 얘기다.

“다음으로 B는 출제교사가 잘못 기재한 정정 전(前) 정답 ‘10:11’을 적어냈고, 1학년 2학기 수학Ⅱ 시험에선 정정 전 정답을 A, B 모두 동일하게 적어냈습니다.”

이 판사가 1시간 가까이 판결 이유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현씨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판사를 바라봤다.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현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고인을 징역 3년6월에 처한다.”

현씨는 다시 수갑을 차고 구치소로 향했다. 변호인 임정수 변호사와 기자들 사이에 문답이 오갔다.

판결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들께서 직접 기록을 보고 판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피고인과 귓속말을 했는데.
“(피고인은)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실망감을 나타낼 수 있어서 차분하게 (선고공판을) 마무리하고, 접견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회원들이 ’이번 판결을 환영한다“며 학생부종합전형 폐지를 촉구했다. [뉴스1]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회원들이 ’이번 판결을 환영한다“며 학생부종합전형 폐지를 촉구했다. [뉴스1]

가정법원 소년부 재판을 받는 두 딸도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피고인 현씨는 항소하겠다는 입장이다. 방청석에 있던 현씨 지인과 숙명여고 졸업생은 혼란스런 얼굴이었다.

“현 선생님이 진짜로 답안을 유출했다면 소위 ‘깨알 정답’을 적은 시험지들과 메모장은 왜 계속 집에 놔뒀을까요? 판사 말대로 그토록 결정적인 증거라면 말이죠.”(지인)

“잘 하는 아이들이 상위권에 촘촘하게 몰려 있어서 내신 성적은 모의고사와 다를 수 있어요. 물리 시험지에 풀이과정이 없었다는 게 좀….”(졸업생)

이 사건은 직접 증거가 없다. 학교 교무실 안에 CCTV가 달려 있지 않았다. 당연히 현씨가 교무실 금고에 보관된 시험 답안을 꺼내 복사하거나 종이에 적어서 갖고 나가는 장면, 딸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녹화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대신 의심스러운 정황은 많았다.

나는 현씨 재판에 여섯 차례 들어갔다. 동료 교사들, 학부모 대표, 학원 강사, 대학 교수 등이 증언대에 올랐다. 검사는 모든 정황이 ‘교무부장의 범행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했다. 변호인은 그 정황들이 ‘의심의 눈으로 들여다보니까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임을 입증하려 했다.

증인들은 대개 흐릿해진 기억을 말하거나 정황에 대해 ‘인상 비평’을 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재판 막바지에 변호인은 2017년 부녀 사이에 오간 문자메시지를 ‘결백의 증거’로 제출했다.

“A가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열흘 정도 앞두고 ‘저 이번 중간 잘 볼 것 같은데요’ ‘서술형 부분 감점 빼고 푼 거 다 맞았어요’라고 문자를 보냅니다. 당시 개인 과외를 받으며 수학 실력이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검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검사는 “피고인은 자택에 문서 파쇄기를 설치해두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폐기했다”고 맞섰다.

내가 이 법정에 주목했던 이유는 풀고 싶은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씨와 쌍둥이 딸은 ‘사건의 정답’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유·무죄를 떠나 아버지가 어린 딸들에게 ‘거짓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 아닌가.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그럴 수 있는가.

지난달 23일 오후 2시 재판에 들어갔다. 쌍둥이 딸에 대한 증인 신문이 있었다. 퇴학당하지 않았다면 고3이 됐을 아이들이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증언 선서를 한 두 딸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변호인과 이런 문답이 오갔다.

허위로 답한다면 증인 인생에 큰 잘못이 생길 뿐 아니라 더 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정답을 알려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자고 해도 증인이 말릴 일이지, 성적 잘 받으려고 외워서 시험을 보고 그럴 일은 절대 아니지요?
“예. 아닙니다.”

검사가 “열심히 공부해서 1등을 했는데 아버지가 교무부장이란 이유로 모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날도 현씨는 여느 때처럼 자세 한번 흩트리지 않고 딸들의 증언 모습을 지켜봤다. 지난 14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현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피고인의 두 딸은 반성하지 않은 채 거짓으로 일관했습니다. 아직 미성년이고, 아버지와 함께 법정에 세우는 것은 가혹하고, 시간이 지나면 뉘우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법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현씨가 최후진술을 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야 우리 가족의 주홍글씨가 사라지겠습니까. 이 재판에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실추된 제 명예와 태풍 앞의 꽃과 같은 두 아이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는 공정한 판결을 기대합니다.”

한국 교육의 프리즘으로 이 사건을 보는 이들이 많다. 재판 시작 전부터 사회는 유죄를 선고했다. 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쌍둥이 아버지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는 왜 ‘무죄’ 입장을 굽히지 않는가. 직접 증거가 없는 만큼 유죄를 받더라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딸들에게도 좋다고 믿는 것인가. 과연 그런 것인가.

“아버지가 아이들의 인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범행 자체보다 더 큰 잘못일 수 있습니다.”(검사)

“저는 살면서 아이들에게 성실함을 강조했고, 저도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현씨)

1심은 현씨와 두 딸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제 세 사람 앞에 항소심과 대법원, 두 번의 재판이 놓여 있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