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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북 식량 지원 확정했지만…넘어야 할 산 많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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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호 06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17일 “정부는 대북 식량 지원 원칙을 이미 확정했고 구체적인 방안에 관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정 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식량 문제는 안보 사항과 관련 없이 인도적 측면에서, 특히 같은 동포로서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북 식량 지원 재개→남북 정상회담→한·미 정상회담(6월 말)→3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비핵화 협상 재개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의용 안보실장 공식 발표 #북 매체 “인도주의적 협력 호들갑” #외무성도 유엔·미국 제재 맹비난 #정부에 식량 지원 요청 아직 안 해 #세계식량기구, 5~9월 지원 요청 #선박 구하기 어려워 적기 놓칠수도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많다. 당장 1단계인 대북 식량 지원 성사 여부도 불투명한 데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와는 달리 유엔 대북제재 결의라는 벽이 놓여 있어서 실무적으로 따져봐야 할 대목도 만만찮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북 지원 요청 선결돼야=정 실장은 이날 “조만간 대북 식량 지원의 (시기·규모·방식 등) 구체적인 계획을 국민 여러분께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어떤 형태로든 정부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상태다.

오히려 북한 외무성은 지난 16일 홈페이지를 통해 “(유엔과 미국의) 제재 자체가 우리의 자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해인 만큼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맞받아나가 짓뭉개버릴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대남 선전매체인 ‘메아리’는 지난 12일 “우리 겨레의 요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몇 건의 인도주의 협력 사업을 놓고 호들갑을 피우는 것은 동족에 대한 예의와 도리도 없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식량 지원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2007년 마지막으로 정부의 대북 식량·비료 지원이 이뤄질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양창석 전 통일부 사회문화교류본부장은 이날 중앙SUNDAY에 “대북 쌀·비료 지원을 위해선 북한의 요청이 있고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정부가 그동안 지켜온 모범답안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에도 최소한 장관급 회담이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한 북한의 요청이 필요한데 과연 요즘 같은 분위기에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양 전 본부장은 지원 방식과 관련, “북한이 유엔에 긴급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군사 전용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분배 모니터링이 가능하고 남남 갈등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엔을 통한 지원이 낫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대북제재가 만든 새로운 벽=과거 식량·비료 지원 때 정부는 육로와 해로를 모두 이용했는데 지원 규모가 클 때는 대부분 해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이후 미국은 2017년 9월 대북 제재 행정명령을 통해 북한 항구를 다녀온 선박은 물론 북한 선박과 물건을 바꿔 실은 선박의 미국 입항을 금지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북한이 최근 석유와 석탄을 해상에서 선박 간 ‘바꿔치기(환적)’ 방식으로 제재를 피하려 했던 이유다. 한국도 2016년 3월 외국 선박이 북한에 기항한 뒤 180일 이내 국내에 입항하는 것을 전면 불허하는 해운 제재를 단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재 우려를 감수하면서까지 북한에 식량을 운반할 선박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나아가 선박 운항에 필수적인 보험 서비스를 제공할 보험사를 찾기도 어려울 수 있다. 또 미국 등의 제재 면제를 받기 위한 절차를 거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해 세계식량기구가 5~9월이라고 설명한 지원 적기를 놓칠 수도 있다.

정부 소식통도 “실무적으로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양 전 본부장은 “2007년엔 인천~남포 직항 노선이 열려 있어 선박이 각종 물자를 싣고 수시로 오갔지만 지금은 대북제재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해운 제재가 의외로 강력한 대북제재라는 사실이 이번에 재확인된 셈”이라고 말했다.

◆북 추가 도발 땐 정권에 부담=대북 식량 지원의 재원은 남북협력기금에서 충당된다. 2019년도 남북협력기금은 1조1063억원인데 이중 대북 인도적 지원과 관련된 구호 지원 예산은 815억원 정도다. 무상 지원이 아니라 과거 식량 지원 때 주로 이용했던 차관 형식을 쓸 경우엔 북한의 약정서 서명이 필요하다.

남북협력기금을 쓸 경우 현행법상 국회 승인은 받지 않아도 되지만 사전에 보고하게 돼 있다. 최소 몇 달이 걸리는 준비 과정에서 북한의 추가 도발로 대북 여론이 악화될 경우 정부에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잖아도 북한 장마당의 쌀 1㎏의 가격이 지난해 말 5000원 선에서 올 들어 4000원 선으로 떨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북한 식량난의 심각성을 놓고서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양 전 본부장은 “2011년부터 이자조차 받지 못하는 차관 형식의 식량 지원 문제를 놓고도 여야 간 쟁점이 됐다”며 “북한이 계속 도발하는 상황에서는 식량 지원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모아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 갤럽이 지난 14~16일 전국 성인 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찬성 44%, 반대 47%로 찬반 여론이 팽팽했다.

차세현·백민정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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