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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기다린 ‘고도’ 그는 꼭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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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 무대. 김성옥(오른쪽)과 함현진이 각각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다. [사진 극단산울림]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 무대. 김성옥(오른쪽)과 함현진이 각각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다. [사진 극단산울림]

“내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운명이지요. 이 작품으로 연극 인생이 바뀌었어요.”

한국 현대연극 대부 임영웅 연출 #내달 50돌 기념 전시·공연 잇따라 #박정자·손숙·윤석화 거쳐간 그곳 #85세 현역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연극 인생 65년, 대표작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 초연 50주년을 맞은 연출가 임영웅(85)은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9년부터 반세기 동안 ‘고도를 기다리며’를 1500여 회 무대에 올리며 22만 명이 넘는 관객들을 만났다.

초연 50주년을 맞아 ‘고도를 기다리며’가 바꿔놓은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아카이브전이 열린다. 다음달 7∼25일 서울 대흥동 마포아트센터에서 펼쳐지는 ‘연출가 임영웅 50년의 기록전’이다. 50주년 기념 공연도 다음달 9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한다. 전시회·공연 준비로 분주한 그를 그의 오랜 무대이자 집인 서울 서교동 산울림 소극장에서 만났다.

1985년 개관 당시 산울림 소극장. [사진 극단산울림]

1985년 개관 당시 산울림 소극장. [사진 극단산울림]

그는 “연극을 시작한 이후 제일 잘했다 싶은 일이 바로 산울림 소극장을 개관한 것”이라며 “누구나 꿈꾸는 전용극장을 가져 지금까지 공연하고 있으니 이보다 큰 보람은 없다”고 말했다. 1985년 사재를 털어 산울림 소극장을 지은 그는 극장 3층에 살림 공간을 마련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가 1970년 극단 산울림을 만들고 이어 산울림 소극장까지 개관하게 된 데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공이 컸다. 1955년 연극 ‘사육신’으로 데뷔한 임영웅은 1959년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부조리극의 대표적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접했다. 1953년 세계 초연했던 작품이었다.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시종일관 얼토당토않은 대화를 나누며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인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다.

초연 팸플릿. [사진 극단산울림]

초연 팸플릿. [사진 극단산울림]

“고도씨는 오늘 밤에 못 오지만 내일 올 예정”이라는 대사로 마무리되는 황당한 내용이지만, 임영웅은 그 속에서 현대인의 초상을 읽어냈다. 그리고 1969년 한국일보 다목적홀 개관 공연 연출 의뢰를 받았을 때 이 작품을 떠올렸다. 초연 직전 사무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 공연으로선 천운이었다. 공연 시작 전에 티켓이 매진됐고, 연장 공연까지 했다.

초연 성공을 계기로 1970년 극단 산울림이 탄생했다. 창단 멤버로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 배우인 김성옥·함현진·김무생·김인태와 김용림·사미자·윤소정·윤여정·손숙 등이 참여했다. 창단 공연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배우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검열 대상이었던 시절이었다.

이번 아카이브전에선 1970년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에 대한 문화공보부 장관 명의의 ‘각본등심사합격증’과 장마다 검열도장이 찍힌 당시 대본이 공개된다. 또 1990년 더블린 연극제에 참가해 베케트의 본고장 관객들을 열광시킨 역사도 공연 사진과 팸플릿, 리뷰 기사 등으로 전시된다.

연출가 임영웅

연출가 임영웅

임영웅의 연출 스타일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자로 잰 듯한 연출’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다. 그의 연출 노트에는 배우의 호흡과 동선, 심리 상태가 대본 위에 빼곡히 적혀있다. 올해 공연에서도 그는 연출을 맡는다. 이번 공연에는 정동환·안석환·김명국·박용수·이호성 등 캐스팅됐다. 이미 여러 차례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하며 그와 호흡을 맞춰온 배우들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탄생시킨 극단 산울림에서 그는 아서 밀러의 ‘비쉬에서 일어난 일’, 최인호의 ‘가위 바위 보’,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강백의 ‘쥬라기의 사람들’ 등 60여 편의 연극을 연출했다. 1986년 산울림소극장 개관 1주년 기념작으로 공연한 ‘위기의 여자’ 이후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담배 피우는 여자’ 등을 잇따라 선보이며 ‘여성 연극’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연극계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는 박정자·손숙·윤석화 배우가 이들 연극의 주인공을 맡으며 객석 75석의 산울림 소극장을 채웠다.

그는 자신의 연극 인생을 돌아보며 “좋은 작가들의 작품을 좋은 배우들과 올릴 수 있어 행복했다”면서 “산울림 극단과 소극장이 계속 좋은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남았다”고 말했다. 또 “임영웅의 ‘고도’는 어느 정도 일단락 짓게 됐다”며 “앞으로 새로운 ‘고도’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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