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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체자 빚 탕감 정책에 '구멍'…정부 "박탈감 느낄까봐 적극 홍보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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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우(56·가명)씨는 1997년 외환위기 전 기업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며 빚이 불어나는 바람에 신용유의자(옛 신용불량자)가 됐다. 추심 압박에 시달리다 아내와 이혼한 그는 30대 중반에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혼자 살면서 택시·버스 운전, 식당일 등을 전전했던 그는 지금은 건설노동자로 일한다. 빚에서 탈출하려고 애쓰던 홍씨는 지난 2월 정부의 장기 소액연체자 지원 제도를 통해 빚 일부를 탕감받았다. 홍씨는 “내가 젊었을 때 이런 제도가 있었다면 회계사 일을 계속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김영희(73·가명)씨는 16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을 돌보며 가사도우미로 일한다. 한때 대형 음식점을 운영했던 부부는 1997년 외환위기로 경기가 고꾸라지면서 빚더미에 올랐다. 김씨는 6년 전 개인파산을 신청했지만 남편의 카드빚은 어쩌지 못했다. 그는 “신용불량이라 건강보험료를 못 냈더니 남편 약값이 한 달에 50만원이 나오더라”고 말했다. 김씨 부부도 지난 2월 장기 소액연체자 지원 제도로 남은 빚 430만원(원금)을 전액 감면받았다. 김씨는 “빚이 없어지니까 완전히 새 삶”이라고 웃었다.

19일 낮 김명수(가명)씨가 서울시 송파구 자택에서 TV를 보고 있다.

19일 낮 김명수(가명)씨가 서울시 송파구 자택에서 TV를 보고 있다.

신용불량의 수렁은 깊어도 너무 깊었다. 홍씨와 김씨는 모두 빚더미에 시달린 지 20년이 넘었다. 연체의 늪에 빠진 뒤 정상적인 금융생활로 돌아오기가 그만큼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이들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2002년 신용회복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채무조정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초기엔 이자 감면폭이 작았다. 실질적인 구제책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홍씨의 경우 2004년 신복위를 찾았다. 그는 8000만원의 원리금(원금 2000만원+이자 6000만원)을 월 60만원씩 8년에 걸쳐 갚아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결국 포기했다.

2013년 설립된 국민행복기금은 장기연체자엔 한 줄기 '빛'이었다. 출범 초기부터 원금의 50~70%를 깎아주고 최장 10년간 나눠 갚게 했다. 홍씨와 김씨 부부는 국민행복기금과 약정을 맺고 빚을 갚아나갔다.

지난해 3월 정부는 더 파격적인 정책을 내놨다. 상환 능력이 없는 장기 소액연체자(원금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에 한해 빚을 완전히 탕감해주기로 했다.

정부 주도로 장기소액연체자 채권을 일괄 소각해주던 정책이 마무리됐다. 사진은 지난해 시행한 장기소액연체자 지원 접수 현장. [뉴스1]

정부 주도로 장기소액연체자 채권을 일괄 소각해주던 정책이 마무리됐다. 사진은 지난해 시행한 장기소액연체자 지원 접수 현장. [뉴스1]

하지만 '구멍'은 있었다. 홍씨는 국민행복기금에 남아있던 720만원의 빚을 탕감받았다. 오래전 민간 추심업체로 채권이 넘어간 더 큰 빚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책 대상자로 추정했던 약 40만명 중 29%만 신청했다는 점도 한계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제도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면 성실 상환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올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장기 소액연체자의 빚을 100% 탕감하는 제도는 지난 2월로 종료됐다. 정부는 아직 남은 장기연체자를 위해 원금의 70~90%를 깎아주기로 했다. 3년 이상 성실하게 갚으면 남은 빚을 면제해주는 특별감면 제도를 오는 6월 시행한다. 대상은 채무원금이 1500만원 이하고 연체 10년 이상인 경우다.

전문가들은 민간 금융회사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장은 “금융회사가 재무상담을 통해 상환 기간을 연장하거나 상환을 미뤄주는 방식으로 연체를 막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주하 서강대 교수(경제학)는 “연 20%대 고금리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인원은 250만명으로 추정된다"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계 상황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득조사를 거쳐 과감하게 이자를 깎아주는 방식의 사적 채무조정 제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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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신혜연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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