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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경찰' 개명 나섰던 헌병, 법제처서 "상위법 바꿔야" 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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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을 군사경찰로 바꾸겠다는 군 당국의 계획이 5개월째 난항을 겪고 있다. 관련 법을 고치는 작업이 법제처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다. 명칭 변경을 위해선 상위 법에 나오는 '헌병'까지 모두 '군사경찰'로 수정돼야 한다는 게 법제처의 입장이다. 이에 따라 군 당국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는 국회만 바라보는 처지가 됐다.

법제처 문턱 넘지 못한 채 공전 국회 개정안 처리 주시 #군 내부에선 "조직쇄신 의지 흐지부지될까 우려"

23일 국방부에 따르면 헌병 병과 명칭을 군사경찰로 바꾸는 군인사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이 지난해 11월 14일부터 12월 24일까지 입법예고를 거친 뒤 다음 단계에서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당시 국방부는 “일제 강점기에 유래한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업무 성격을 명확히 하는 등 조직 쇄신을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개정안은 법제처 심사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지난 1월 안으로 완료됐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1월 14일 해당 개정안을 접수한 법제처는 3개월 넘게 심사 중이다.

군인사법 시행령을 붙잡고 있는 법제처의 논리는 대통령령인 시행령을 고치기 위해선 상위 법인 법률 개정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법원법이 대표적이다. 이 법률은 범죄 수사 권한을 부여하면서 ‘헌병과의 장교’라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군 당국자는 “법률에서 '헌병'이란 단어가 '군사경찰;로 모두 고쳐져야 하위법인 시행령 심사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게 법제처 의견”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군 당국은 법률 개정 권한을 갖고 있는 국회로 눈을 돌렸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지난 1월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이 발의한 군사법원법 개정안은 '헌병'을 '군사경찰'로 고쳐놨지만 국회가 공전하면서 관련 상임위인 국방위에 회부된 채 한 발짝도 못 나아가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4월 임시국회는 이미 파행이고, 5월 임시국회도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며 “국회가 열리면 가능한 빨리 상임위 전체회의 상정부터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다양한 경로로 협조를 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헌병 명칭 개정이 기약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자 법제처의 유연한 해석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병과 명칭을 정하는 기본법인 군인사법이 개정된 뒤 병과 역할을 규정하는 다른 법률이 고쳐져도 법 집행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도 있다. 안보지원사령부로 해편(解編)된 기무사령부의 경우 군사법원법에는 '기무부대'라고 돼 있지만, 군인사법에는 부칙을 통해 개정이 완료됐다. 수사 기관의 동일성이 인정돼 실무상 문제가 없다는 해석이다.

헌병 명칭을 군사경찰로 바꾸는 게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닌데 법률 개정 사안의 범주에 넣는 건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최근 법제처에 이런 의견을 전달하며 재고를 요청했다고 한다. 군 관계자는 “쇄신을 위한 군의 노력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흐지부지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헌병(憲兵)은 군대 안에서 질서 유지와 군기 확립, 법률이나 명령 시행, 범죄 예방과 수사 활동, 교도소 운용, 교통 통제, 포로의 관리, 군사 시설과 정부 재산 보호 등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강점통치에 앞장섰던 일본 켄페이타이(憲兵隊ㆍ헌병대)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일제 헌병대는 군사 경찰 임무 이외 민간 경찰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 ‘육군헌병조레’에 따라 헌병대와 헌병사령부가 만들어졌고, 지금의 헌병은 일제 헌병대가 아닌 대한제국 헌병대와 유사하다는 여론도 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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