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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정운찬 돌직구에 대답 한마디 안 한 문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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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대통령께서 다음 주 미국에 가신다는데, 보수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북한(김정은)을 만나달라’고 하러 가시는 것 같은데…. 남북회담에 대해서도 보수들 걱정이 많습니다. 남·북·미 정상회담이라도 해서 보수들의 걱정을 덜어주면 어떻겠습니까”

‘보수 안보 걱정 덜어달라’에 침묵 #미, 한국 불신 심각 … “안 믿는다” #‘숨소리’까지 공유한 DJ 본받아야

지난 3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경제계 원로들의 오찬 간담회.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이런 ‘돌직구’를 문 대통령에게 던졌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정운찬은  “다들 경제를 얘기했지만 난 총리 출신이라 의제에 없던 안보를 꺼낸 건데 대통령이 대답이 없더라. 하긴 준비가 안 됐을 테니까…”라고 했다. 정답이다. 지도자는 돌발 질문을 당할 때 콘텐츠가 드러난다. 문 대통령이 한미동맹에 대해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문재인 정부 2년만에 한미관계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4·11 한미정상회담은 2분짜리 단독회담 끝에 공동 발표문 한장 내지 못하고 끝났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는 한 발 더 나가 “한국 정부가 나와 정보 공유를 안 해 비핵화 중간단계가 뭔지 모르겠다”고 일갈했다. 덕담이 주 임무인 주한 미 대사가 대놓고 정부에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삐걱대는 한미관계의 적나라한 현주소다.

대북제재 허들을 어떻게든 넘어 남북교류에 속도를 내고 싶은 정부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 반대하면 끝이다. 싫든 좋든 한미동맹 기반 위에서 북한에 다가가야 하는 게 글로벌 국가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오른팔인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현장의 숨소리까지 다 미국에 알려줘라”고 했다. 그해 5월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서울을 찾은 웬디 셔먼은 박지원에게 “오늘 밤 와인이나 하자”고 청했다. 박지원은 셔먼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면서 회담 추진 상황과 대북 핵심 정보를 죄다 얘기해줬다. 월척을 낚은 셔먼의 입이 귀에 걸렸다. 셔먼은 혼자 나온 게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미 정보 요원 2명이 앉아 박지원의 말을 다 받아적었다. 만취해 비틀대며 청와대로 돌아온 박지원에게 김대중은 “수고했다”며 등을 두들겨줬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은 미국만 바라본다. 대한민국은 별로 안중에 없다. 우리 말발이 북한에 먹힐 때는 미국이 우리를 믿고 힘을 실어줄 때뿐이다. 이걸 김대중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미국에 과하다 싶을 만큼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카드는 적중했다.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은 김대중의 든든한 팬이 됐다. 클린턴 시절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순항한 이유다.

문 정부는 반대다. 말로만 동맹을 우선한다면서 행동은 거꾸로 간다. 이런 행태를 미국이 모를 리 없다. 미 정보 당국 관계자를 만난 범여권 인사의 전언이다. “그가 청와대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과 대화 내용을 실명까지 거론하며 너무도 환히 꿰고 있더라. ‘우린 다 알고 있다. 그들(청와대)을 믿지 않는다’고 해 더욱 경악했다”

미국의 정보망은 무섭다. 우리 정부 수뇌부에서 오간 대화는 늦어도 며칠 안에 워싱턴에 흘러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북한 문제를 논의할 때면 입을 다물고 화이트 보드에 매직펜으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필담으로 했다. 하지만 결정된 내용은 ‘숨소리까지’ 미국에 전해줬다. 미국을 속이기란 불가능하고, 미국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반미면 어떠냐”고 큰소리쳤던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 “우리가 미국에 등을 돌릴 경우 미국이 보복할 방법이 몇 개인지 알아보라”고 명했다. 조사 결과 미국은 대한민국의 기둥뿌리를 뒤흔들 카드를 50개 넘게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첫 번째 카드인 ‘대북 위성 정보 제공 중단’ 하나만으로 우리 국군 전력은 휴짓조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놀란 노무현은 반미 노선을 접고 ‘용미’로 선회했다.

문 대통령도 북한 중시 일변도 노선을 버리고 김대중의 혜안을 따라 한미관계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힘이 실려 북한이 문 대통령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문 대통령을 무시해온 일본·중국의 태도도 바뀌게 될 것이다.

‘종미’ 보수의 헛소리가 아니다. 4선 의원이 된 지금도 김대중의 햇볕정책 ‘전도사’로 활동 중인 박지원 의원이 지난 12일 페이스북에 쓴  주장이다. “문 대통령의 선(先) 남북경협을 반대하며 한·미동맹, 숨소리까지 공유해야 한다. 남북문제는 미국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니 과속하지 말아야 한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