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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영범의 이코노믹스

49세가 퇴출 1순위, 근속연수 따라 임금 뛰는 호봉제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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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영범의 이코노믹스] 주된 일자리 평균 퇴직 연령 살펴보니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국내 기업의 임금 구조는 ‘판도라의 상자’다. 너무 복잡해 손을 댈라치면 노동시장을 뒤흔드는 후폭풍이 몰아친다는 뜻이다. 이런 혼란의 근원은 기본급 비중이 작은 호봉제 임금체계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이 구조가 노동시장 왜곡의 출발이라는 점이다.

기본급 작은 호봉제가 문제의 근원 #생산성 무관하게 임금 오르는 구조 #이런 임금체계론 노동개혁 불가능 #노조 설득해 유연한 체계 만들어야

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주된 일자리의 은퇴 연령은 평균 49.1세다. 이 같은 ‘조기 퇴직’은 호봉제 임금체계와 무관치 않다. 조직 기여도는 작은데 근속 연수에 따라 보상이 많아지기 때문에 중·장년 정규직 근로자들이 50세도 되기 전에 퇴직하는 배경이라는 얘기다. 이런 호봉제 임금체계를 가진 사업체는 2016년 기준으로 60%에 달한다. 특히 임금수준이 높은 금융산업에선 90% 이상의 사업체가 호봉제 임금체계를 갖고 있다.

한국과 유사한 임금체계를 가진 일본에 비해서도 근속 연수 증가에 따른 임금상승 폭이 크다. 입사 1년 차 근로자의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10년 차 재직자의 임금은 한국 212.3, 일본 165.9다. 근속 연수가 길수록 격차가 더욱 벌어져 30년 이상 근속자의 경우 한국은 328.8, 일본 246.8이다.

금융권이나 대기업·공공부문 퇴직자들은 그나마 희망퇴직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만한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사회보장체계가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미흡해서다. 주된 일자리에서 밀려난 많은 중·장년층은 결국 경비직 같은 단순 노무직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노인의 실질 은퇴 연령은 남자 72.9세,여자 73.1세(2012~2017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부작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복잡한 임금체계는 정부 정책을 펴는 데도 장애물이다. 2016년 기준으로 최저임금 적용 대상인데도 연봉 6000만원을 넘는 근로자가 5만 명에 달했다. 법에 정한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정기상여금·복리후생비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에 따른 부정적 효과를 완화하는 취지에서 지난해 5월 정기상여금·복리후생비의 일부를 최저임금에 포함하는 법이 노동계의 참여 없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상여금 지급 시기의 변경 등 급여체계 개편과 관련해 노조의 동의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강성 노조가 있는 대형 사업장에서는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평균 연봉 9000만원이 넘는 현대차의 경우 6000여 명이 올해 최저임금에 미달한다. 상여금 지급방식 변경 등에 관한 노사합의가 없다면 연봉 5000만원이 넘는 신입 직원까지 최저임금 기준에 미달해 연봉이 자동으로 올해 최저임금 인상률인 10.9% 올라가면서 다른 직원들의 급여 인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유급 주휴수당을 월급 근로자의 최저임금 시급 산정에 포함하는 법 시행령 개정도 복잡한 임금체계에서 비롯됐다. 특히 시행령 개정 논란으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법정 주휴수당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혼란을 증폭했다. 이런 혼란은 결과적으로 고액 연봉자가 최저임금의 적용 대상이 되는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가 시작된 최저임금의 산입범위 확대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정부 지침은 최저임금에 유급 주휴 시간을 포함하지만 법원은 실제 일한 시간만 포함하라는 판단을 내놓아 분쟁의 소지가 여전하다.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법정 주휴수당이 고용주의 부담이 되면서 아예 주휴수당을 줄 필요가 없도록 주당 근로시간을 15시간 미만으로 축소하는 ‘쪼개기 고용’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주당 근로시간이 17시간 미만인 초단시간 근로자 수는 통계청이 1980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 처음으로 150만명을 넘어섰다.

휴일 및 연장근로 수당의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도 복잡한 임금체계 때문에 법적 분쟁의 소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간 통상임금 산정에 정기적 상여금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정부지침이 제시돼 노사는 이를 기준으로 노사협의 및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2013년 대법원이 “정기상여금도 고정성·정기성·일률성을 충족한다면 통상임금의 일부로 봐야 한다”면서 기존의 임금 수준이나 임금체계가 노사합의를 존중하는 ‘신의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노사 간 법적 분쟁을 촉발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고, 고령사회로 접어든 현시점에서 이런 연공식 호봉제로는 기업도 근로자도 버틸 수 없다. 그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때 임금피크제가 추진되고, 성과연봉제도 도입됐지만 모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더구나 지난해 최저임금법 및 시행령의 개정과 관련된 문재인 정부의 기조를 보면 미래지향적 임금체계 개편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2016년부터 정년 60세가 단계적으로 도입되면서 법에 정해진 ‘임금체계 개편’ 논의가 사문화됐다는 것이 문제다. 당초 임금피크제는 한국노총이 참여한 노사정 합의를 기반으로 2017년부터 도입됐다. 그러나 올해부터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사실상 없어지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공공기관 및 금융권에서는 폐지 내지 임금 삭감의 정도를 완화하자는 주장이 노조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더 암담한 것은 결국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정치권과 정부의 역할 부재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와 관련해 노동계가 반발하자 사회적 대화 복귀를 조건으로 통상임금 범위 확대를 약속하면서 임금체계 개편 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또 정부는 노사정 합의를 통해 임금체계 개편을 하겠다고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1999년 전교조 합법화 이후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 참여를 거부하거나 참여해도 합의까지 이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계가 양분돼 있어 산하 사업장 노조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노동계의 리더십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달 실패로 끝난 탄력 근로제 연장을 둘러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파행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사정 대화 노력은 지속하되 지금이라도 특정 산업이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임금 근로자를 예외로 하는 일본의 근로시간 규제, 특정 산업이나 직종의 근로자를 연장근로수당 지급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미국식 대안과 같은 절충점의 도입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후폭풍 계속되는 주휴수당과 최저임금 체계

주휴수당과 최저임금 산입범위 관련 법 개정의 후폭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휴수당은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때부터 있던 것으로 사용자에게 지급의무가 있지만 복잡한 임금체계 등으로 많은 사업주는 물론이고 근로자들도 인지하고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반영되면 최저임금이 10.9% 이상 오르는 효과가 나타나 고용주의 부담은 늘어난다.

최저임금은 산입범위가 확대되지만 임금체계에 따라 인상 효과가 달라진다. 2018년 월 급여로 기본급이 157만3770원, 복리후생비 40만원을 받고 있던 근로자 A는 복리후생비 일부(27만7840원)가 최저임금에 포함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임금인상 효과는 없다. 반면에 기본급은 같으나 상여금으로 매달 40만원을 지급받던 근로자 B는 상여금의 경우 월 최저임금의 25%(43만6287원) 이상의 금액만 산입되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으로만 급여가 8.6% 오른다. 사용자는 근로자 B의 임금을 A와 같은 방식으로 변경할 수 있다.

근로자 A도 올해 임금은 인상될 수 있다. 최저임금은 법으로 강제하는 임금의 최저 수준일 뿐이고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논리에 따라 임금이 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균 연봉이 높으나 최저임금 수준에 미달하는 근로자가 많은 대형 사업장의 경우 임금체계 변경을 노조가 조건 없이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결국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노동시장 양극화는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미 코넬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과 노사정위원회 노동시장선진화위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