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31. 철원길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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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철원길병원 기공식에 참석한 필자(오른쪽에서 둘째).

1984년 철원지역 땅굴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자격으로 견학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버스 옆 자리에 동석한 철원지역 자문위원이 나에게 "철원에 병원을 하나 꼭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주민들이 병원에 가려면 민통선(民統線)을 빠져나와 멀리 의정부나 서울까지 다녀야 한다"며 "양평에도 취약지 병원을 세웠으니, 철원에도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양평길병원이 적자인 데다 인천 구월동에 500병상 규모의 길병원을 신축 중이던 때였다. 나는 또 다른 '적자병원'을 운영할 수 없어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분은 "병원 건물은 지역에서 지을 테니, 의사만이라도 보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양평에도 가지 않으려는 의사들에게 철원은 물으나 마나 아닌가. "의사도 보내 드리기 어렵습니다"라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

그 대신 나는 "우리 의료진이 철원에 정기적으로 들러서 무료 진료를 해드리고, 철원 분들이 인천길병원에서 진료받을 때 의료보험 수가를 적용해 드릴 수 있다"고 약속했다. 의료취약지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의료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인천길병원과 철원군이 자매결연을 하여 주민들은 인천에 와서 진료를 받고, 길병원은 철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진료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원 병원건립위원회 주민 몇 분이 인천으로 나를 찾아왔다.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를 매일같이 방문해 병원 설립 예산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사부 고위간부가 "병원건립 예산은 지원하지만, 운영자는 정부에서도 마음대로 지정할 수 없다. 양평병원도 여러 대학병원에 인수를 요청했지만, 적자가 예상된다는 이유로 2년간 문을 열지 못하고 방치됐었다. 병원을 운영할 사람은 주민들이 직접 찾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머뭇거렸다. 벌써 1000여 명으로 늘어난 길병원 가족의 생계와 앞날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그날 이후 석 달 동안 매일같이 인천길병원으로 나를 찾아와 병원을 맡아달라고 졸랐다. 한편으로 84년 8월에는 철원지역 주민 5013명이 연명으로 종합병원 유치 청원서를 보사부 등 관계당국에 제출했다. 보사부는 취약지 병원 지원자금 100병상 분을 강원도에 배정했고, 강원도에서도 나에게 병원 설립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의 요청은 간절하고도 집요했다. 이렇게 절실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데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었다.

84년 11월, 보사부는 정부지원 민간병원 건립 및 운영권을 확정, 철원길병원의 건립을 공식화했다. 정부 지원 15억원과 OECF(해외경제협력기금) 차관 100만 달러로 지상 3층, 지하 1층의 전산화단층촬영기 등 최신 의료장비를 갖춘 철원길병원이 88년 7월 개원했다.

나는 접적(接敵)지역이자 의료취약지인 철원 병원이, 언젠가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의 선진 의료를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먼저 펼치는 거점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머지않아 이 병원에서 북한의 동포들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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