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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국이 전체주의 국가냐" 공기업 통일의무교육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전력 직원 A씨는 지난주 회사 PC로 사내 인트라넷을 켰다가 깜짝 놀랐다. 팝업창에 뜬 ‘2019년 공공 통일교육 e러닝 의무 수강 공지’를 보고서다. 교육 과목엔 ‘문재인의 한반도 정책’, ‘통일문제이해’, ‘북한 이해’ 등이 적혀있었고, 이달 말까지 필수 학습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A씨는 17일 “우리나라가 전체주의 국가도 아닌데, 정부 정책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와 부서 팀장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의무 교육이니 꼭 들어야 한다는 말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A씨는 결국 근무시간 중 동영상을 틀어놓고 보지는 않는 방식으로 교육을 이수했다고 했다.

통일교육원이 제작한 사이버강의 영상 '문재인의 한반도 정책' 중 한 장면. [동영상 캡처]

통일교육원이 제작한 사이버강의 영상 '문재인의 한반도 정책' 중 한 장면. [동영상 캡처]

공기업인 한전이 직원들에게 통일교육을 실시하는 건 지난해 국회에서 통과된 통일교육지원법 개정안 때문이다.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2016년 발의해 작년 초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던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중(2월 20일)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개정안 자체엔 대국민 통일교육에 대한 일반적 규정만 명시돼 있고 구체적 교육 계획은 통일부에 위임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은 지난해 8월 모든 공공기관에 “2018년 9월14일부터 통일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게 됨을 알린다. 통일 교육은 매년 1회 이상, 1시간 이상 실시해야 하고 그 결과는 내년 2월 말까지 통일교육원에 제출하라”는 지침의 공문을 발송했다.

자유한국당 원유철 의원이 통일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통일교육 의무 교육 대상 기관은 3000개가 넘는다. 중앙정부ㆍ지방정부ㆍ행정부처 등 일반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른 공공기관(정부 출연기관 또는 정부가 일정 수준 이상의 지분을 가진 기관 등)도 모두 의무 대상에 포함됐다. 여기엔 한국전력이나 KBS 등도 들어간다.

통일교육원에 제출된 실적은 국무회의에 보고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기관장 입장에선 교육실적을 신경 쓸 수 밖에 없다. 다만 지난해는 시행 첫해임을 감안해 실적 제출은 유예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이 시작된 상태다.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이 지난해 8월 공공기관에 배포한 공문. [원유철 의원실 제공]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이 지난해 8월 공공기관에 배포한 공문. [원유철 의원실 제공]

그러나 한전 직원들 사이에선 “공무원이면 몰라도 공기업 직원들까지 정부 정책을 강제로 학습하라는 건 너무 심하다”는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전 직원들의 커뮤니티 앱에선 “세월이 거꾸로 돌아가 버린 느낌이다”, “신문 보면 알 수 있는 걸 왜 들어야 하는지 의문”, “정신 나간 것 아닌가”는 등의 불만이 올라오고 있다. 다른 공기업에서도 통일교육을 실시하면 비슷한 불만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한 직장인 전용 커뮤니티 앱에서 한국전력 직원들이 올린 글과 댓글들. [독자 제공]

한 직장인 전용 커뮤니티 앱에서 한국전력 직원들이 올린 글과 댓글들. [독자 제공]

이에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초기에 어느 정도의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교육 방식은 집합 교육(대면 강의, 시청각 교육), 사이버 강의, 기관 특성에 맞는 기타 방법 중 각 기관이 재량껏 선택할 수 있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이버 강의 역시 통일교육원에 올라온 37개 교육 영상 중 기관장이 재량껏 선택할 수 있다. 반드시 ‘문재인 정부 통일정책’만을 봐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원유철 의원은 “통일 교육 취지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이념에 치우쳐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또 권유 또는 자발적 참여로 진행돼야 할 통일 학습을 강제로 주입시켜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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