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한국, 농업지키기 계속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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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WTO) 장관급 회담은 실패로 끝을 맺었다. 이번 회의는 농산물 수출 개도국 그룹 'G21'이 투자.경쟁정책.정부조달 투명성.무역 활성화 등 네 가지 이슈를 지칭하는 소위 '싱가포르 이슈'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싱가포르 이슈는 미국의 지지를 받은 유럽연합(EU)이 수년 전 WTO 각료회의에서 제기한 문제다. 흥미롭게도 이번 회담 결렬의 1차적 원인은 싱가포르 이슈 네 가지를 이번 회담의 의제로 상정해야 한다고 고집한 한국 때문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한국 정부만이 알 일이지만 결국 한국이 EU를 대신해 행동한 셈이 됐다.

하지만 이번 회담 결렬의 진짜 원인은 싱가포르 이슈가 아니라 농업문제였다는 게 대다수 무역정책 전문가의 판단이다. G21 국가들은 사실 농산물 개방을 주장하고 싶었지만 EU 등이 주장하는 싱가포르 이슈에 가려 뜻을 제대로 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EU와 한국.일본은 돌아가면서 농산물 시장의 추가 개방은 어렵다고 은연 중에 말해 왔다. 특히 EU 측은 칸쿤에 파견된 대표들이 농업협상에서 과거에 말해왔던 것 이상을 제시하지 못했다. EU 회원국들이 이를 반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이 한국으로선 가장 큰 딜레마가 될 전망이다. 한국은 농산물에 관한 한 매우 폐쇄된 시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동시에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한국만큼 WTO라는 세계무역 제도가 절실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은 모두 거대 수출상들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국내 수요가 큰 역할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경제성장에서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수출이다. 세계무역 제도가 붕괴되는데 한국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세계무역 제도의 붕괴는 곧 한국의 미래에 아주 크고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조만간 한국은 지금까지 겪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세계 경쟁에 직면할 것이며 농산물시장 개방협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한국에 대한 압력이 EU나 일본, 심지어 미국만큼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EU와 미국은 둘 다 설탕.면화 등 개발도상국, 그 중에서도 열대지역 국가들이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자국 농산품에 보조금을 지원한 죄과가 있기 때문이다.

열대 지역 개도국들은 EU와 미국이 이 같은 자국 농산물에 보조금을 주지 않는다면 수출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분명히, 그리고 정확하게 믿고 있다.

농산물 수출보조금의 이면에는 또 다른, 어떻게 보면 더 큰 문제, 즉 시장 접근의 문제가 잠재해 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WTO 협정에 따라 아시아와 환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한국과 일본의 공산품.서비스업에 시장을 개방했다.

하지만 한국.일본의 핵심 농산물시장은 대부분 폐쇄된 채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두 나라가 WTO 체제뿐 아니라 아시아 내에서도 이루고자 하는 것에 점점 더 장애물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은 앞으로 '북아시아 자유무역지대'와 같은 영역을 구축해 나갈지 모른다. 그래서 중국이 정교한 공산품과 서비스산업에 대한 수입 문호를 더욱 넓게 개방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에 농산물을 수출하는 데 심각한 제한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중국 인구의 60%가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 서부 지역이 앞으로 또 다른 농산물 생산 지역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멀지 않은 미래에 아주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농산물시장을 보호하다가 한국의 수출에 필수적인 WTO 체제 발전이 방해가 되는데도, 한국은 세계적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작고, 위축돼 가는 농업부문을 계속 보호하길 원하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 한국의 공산품과 서비스산업의 중국 시장 진출을 방해한다 해도 농업 지키기를 계속해 나갈 것인가. 한국이 선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에드워드 그레이엄 국제경제연구원(IIE) 선임연구원
정리=최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