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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최악인데 정권 핵심 “뭐가 문제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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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위기의 한국 외교 <하> 

“한·일 관계에 아무 문제도 없는데 자꾸 뭐가 문제라는 거죠?”
지난해 10월 9일 도쿄에서 열린 외무성 주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참석하자 우리 정부의 핵심 외교안보 라인에서 나왔다는 반응이다.

지난해 10월 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열린 &#39;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선언&#39;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연합뉴스,주일 한국대사관 제공]

지난해 10월 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열린 &#39;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선언&#39;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연합뉴스,주일 한국대사관 제공]

그러나 당시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판결을 앞두고 양국 외교 당국이 크게 긴장했던 때였다.

끝없이 추락하는 한·일관계 #징용판결 후 5개월째 외교 방치 #정부 대일 외교원칙·전문가 부재 #양국 관계 조율할 ‘큰 그림’ 없어 #일본 ‘한국 무관심은 의도적’ 의심

아베 총리의 심포지엄 참석도 한국에 대한 압박에 나서기 위한 명분 쌓기용 포석이었다. 그런데도 정부 내에선 ‘앞서 열린 서울 행사 땐 문재인 대통령이 불참했는데도 도쿄에선 아베 총리가 나왔으니 잘 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불과 5개월여,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과거사에 대한 양국 간 고질적인 갈등 구조, 한국 진보 정권과 일본 보수 정권 간 뚜렷한 인식차가 근본적 배경이다.

 지난해 11월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39;ABAC과의 대화&#39; 참석한 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연합뉴스]

지난해 11월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39;ABAC과의 대화&#39; 참석한 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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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역대 일본 정권 중에서 한국에 대해 유독 경직된 아베 정권의 성향과 한국을 향한 강 대 강 대응이 위기를 심화시켰다.

아베 정부는 26일엔 초등학생들에게 독도를 일본 땅으로 주입하는 검정교과서를 공개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은 더욱 축소 기술됐고, 대신 한국을 ‘불법점거국’으로 전면에 등장시켰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심의회에서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억지 주장이 담긴 사회과목 교과서 12종에 대한 검정을 승인한 26일 오후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초치되고 있다.[뉴스1]

일본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심의회에서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억지 주장이 담긴 사회과목 교과서 12종에 대한 검정을 승인한 26일 오후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초치되고 있다.[뉴스1]

그럼에도 한국 역시 아베 정부의 폭주를 통제할 명분도, 설득력도, 영향력도 확보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무엇보다 대일 외교에 대한 철학과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 정부 소식통은 “미국과 중국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동북아에서 일본과 향후 어떤 관계를 구축할지의 비전이 정부 출범 2년이 지나도록 눈에 띄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대일외교 비전없고 대북변수로만 여겨" 

“한국은 대일 관계를 남북 관계 문제와 관련해서만 본다. 너무 협소하다”(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큰 그림이 없으니 개별 사안에 대한 대응 마련도 어렵고, 대일 외교의 사실상 유일한 기조인 ‘과거사와 미래지향 투트랙’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뉴욕에서 회담하는 한-일 정상 [연합뉴스]

지난해 9월 뉴욕에서 회담하는 한-일 정상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의 징용판결 전부터 이 문제가 양국 관계의 최대 뇌관이 될 것이라고 양국 외교 라인은 예상했다. 하지만 판결 뒤 다섯 달이 지나도록 한국 정부는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도쿄의 주일대사관도 일본 정부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만 전하고 있다.

정부가 도쿄 현장에 내린 지침은 ‘징용 피해자들이 수십 년 동안 자기 돈을 써 가며 해온 소송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 ‘설사 압류 조치된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재산이 현금화되고, 그 보복으로 일본이 한국에 경제 제재를 가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그러자 송금 제한과 관세 인상 등의 보복 조치를 공개적으로 꺼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 무시로 일관하며 일본의 외교 협의 요청을 계속 뿌리치는 듯한 모양새로 국제 사회에 비치고 있어 문제다.

일본 정부 인사들은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있고, 아베 정부의 ‘강한 일본’ 선전에 독도 문제를 활용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외교 방치가 양국 관계의 파국을 불렀다”는 식의 한국 책임론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 있어서다.

아베 정부는 한·일 현안을 놓고 일을 키워 국내 정치에 활용한다는 비판을 한국 내에서 받아 왔다.

아베 총리가 지난해 12월 방위상에게 기자회견을 지시하는 등 국방 당국 간 협의로 조용히 끝낼 수 있었던 이른바 ‘레이더 조준 주장’을 일부러 키운 게 대표적이다. 이처럼 노골적인 형태는 아니더라도 “한국 정부 역시 어려운 국내 경제 사정에 따른 민심 악화의 출구로 양국 관계를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본 내엔 확산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해 5월 9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오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로부터 깜짝 케이크 선물을 받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해 5월 9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오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로부터 깜짝 케이크 선물을 받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징용 피해자 판결과 이에 따라 후속 조치 등을 놓고 한국 정부의 침묵 자체가 의도적이라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에 빌미를 준 게 정부가 입장 정리를 위해 꾸렸다는 국무총리실 징용TF다. 징용TF는 계속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다.

또 한·일 전문가들이 유력한 해법으로 주목해온 ‘한국 정부·기업, 일본 기업이 참가하는 기금 설립안’에 정부는 오히려 “비상식적”이라고 선을 그었다.

일본 여론 전하면 "일본사람이냐"추궁도

정부 관계자는 “여권 지지층이 자유한국당 인사들을 ‘토착왜구’라고 비판하는 상황에서 정부건 민간이건 일본 측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 결정을 주도하는 정부 내 핵심 라인에 일본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없어 일본을 상대로 강경 일변도로 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지금 반한(反韓)을 넘어 멸한(蔑韓)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화된 일본 내 여론을 전하거나, 대일 관계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가 정부 내에서 “당신 일본 사람이냐”는 폭언을 들었다는 인사도 있을 정도다.

“한국은 저팬 패싱, 일본은 코리아 패싱으로 외교를 방치하고 있다”(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말이 나오는 현재의 상황은 일본 내 지한파들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미쓰비시상사 회장 출신이자 양국 경제 협력을 강조해온 사사키 미키오 일한경제협회 회장에게도 “미쓰비시 중공업의 자산이 압류되는 판에 왜 그런 직을 유지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간 한·일 관계의 정석은 정치라는 상부구조에 관계없이 경제와 문화라는 양국의 하부 구조는 튼튼히 다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상부 구조의 갈등이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라는 하부 구조까지 허물 조짐이다.

도쿄=서승욱·윤설영 특파원, 서울=전수진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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