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고위공무원단제, 줄대기·코드인사 걱정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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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1일 시행됐다. 잘만 운용되면 정부 수립 이후 계속돼 온 연공서열식 공직사회에 일대 변혁을 몰고 올 것이다. 이 제도 시행으로 1~3급 실.국장 1305명의 계급이 없어진다. 일의 난이도에 따라 자리를 가~마 등급으로 구분해 장관들이 필요한 사람을 아무나 앉힐 수 있다. 자리의 20%는 민간인에게, 30%는 다른 부처 공무원에게 개방된다. 연봉도 능력과 성과에 따라 최고 1177만원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2008년이 되면 더 벌어진다. 2년 연속 최하위 평가를 받고 2년간 보직을 못 받으면 직권면직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일을 적당히 하면 고시 기수에 따라 1급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철밥통'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개방과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월급도 줄고 옷을 벗을 수도 있다. 인적 교류가 늘어나면서 부처 이기주의가 줄고 업무 협조가 잘될 것이다.

고위공무원단 제도 도입이 노린 것은 이런 효과다. 하지만 이런 바람직한 변화들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로 인한 부작용이 걱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 줄대기가 걱정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고위공무원이 하나의 인력 풀(Pool)에 들어가게 되고 개별 부처가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인사를 하게 된다. 공무원들이 좋은 보직을 받기 위해 지연.학연 등을 총동원할 우려가 높다. 게다가 정권이 바뀌어 코드에 맞는 사람을 뽑아 쓰면 정권과 장관에 대한 충성 경쟁이 격화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흔들리고 나아가 직업공무원의 기본 정신이 훼손될 것이다.

보직 개방의 실효성 문제도 제기된다. 고위공무원단 제도의 핵심은 자리의 절반을 민간과 다른 부처에 개방하는 점이다. 현재 각 부처가 개방하겠다고 내놓은 자리에 대학정책실장이나 금융정책국장 등 요직도 있지만 투융자평가통계관.생명과학단지조성단장처럼 비인기직이 많다. 여기에다 조건을 까다롭게 하면 누가 가겠는가.

김대중 정부 때 개방직의 불과 12.1%, 현 정부에서도 35.7%에만 민간인이 임용됐다. 나머지는 소속 부처 공무원이 거의 다 차지해 '무늬만 개방'에 그쳤다. 또 재경부나 기획예산처 등 힘 있는 부처 공무원들이 개방직이나 공모직을 독식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우리보다 이 제도를 먼저 시행한 미국.영국.캐나다도 개방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고 실적이 저조한 공무원 퇴출에 소극적인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은 평가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거기에 생사여탈권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시행된 성과평가제도는 민간위원의 전문성 결여, 단기간 겉핥기식 평가 등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평가의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제도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아무리 제도가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콘텐트가 빈약하고 운영이 왜곡되면 이상만 앞세운 개혁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 사례를 무수히 봐 왔다. 정부는 이 제도에 대한 비판이 근거 없다고 강변할 게 아니라 보완할 건 보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무원들에게 혁신 스트레스를 하나 더 얹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