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선(善) 한국당은 악(惡), 이런 생각으론 정치가 안 됩니다.”
정성호(57)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강대강(强對强) 일변도인 현 정치권 상황에 ‘여당인 민주당의 책임은 없느냐’는 질문에 한 대답이었다.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4층 기획재정위원장실에서 만난 정 의원은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국민이 뽑아줬다. 그들을 악으로 규정하는 건 뽑아 준 국민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국당도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건 똑같은 만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무적(無敵)의 신사’라는 별명이 있다. 온화하고 친근한 성품 덕에 주변에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근육 때문에 적이 없는 것이란 우스갯말도 있다. 정 의원은 서울대 법대 재학 당시 역도부 주장을 했다. 지금도 역기를 다루며 근육질 몸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정 의원은 최근 여당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마다치 않고 있다. 그가 달라진 걸까. 지난 20일 중앙일보가 밀착마크했다.
“내가 이재명계가 아니라 이재명이 내 계보”
정 의원은 이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무공수훈 관련 인사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었다. ‘보훈 가족에 감사하는 민주당 의원 모임’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특전사 출신이다”, “내 아버지도 육군 상사였다” 등 참석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 인연을 소개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인 정 의원은 2016년 총선에서 수도권에서 민주당 의원 중 가장 높은 득표율(61.4%)로 당선돼 3선에 성공했다. 경기 북부 지역(경기도 양주)은 보수 성향이 강해 민주당에서도 화제가 된 승리였다. 최근엔 민주당 차기 원내대표 선거 출마설이 돌았다. 간담회를 마친 그의 차량에 동승했다.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의 점심 약속에 가는 길이었다.
- 차기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하나.
- “접었다.”
- 이유가.
- “대화와 타협, 협치를 중시하는 나 같은 스타일보다는 야당과 싸워 이기는 스타일을 원하는 게 당 분위기다.”
- 청와대가 전투력이 강한 원내대표를 바라는 건가.
- “그렇진 않다. 청와대에서 누구를 민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었다.”
정 의원의 불출마로 오는 5월로 예정된 민주당 원내대표 선거는 김태년ㆍ노웅래ㆍ이인영 의원의 3파전으로 치러질 공산이 커졌다.
- 당내에선 친 이재명계로 분류되던데.
- “이재명 경기지사와는 가족처럼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사법연수원 동기(18기)다. 나이는 내가 3살이 많고 정치도 먼저 시작했다. 그렇게 보면 내가 이재명계가 아니고 이재명이 내 계보라고 해야 맞다. 내가 이 지사의 정치적 멘토에 가깝다.”
- 친문계가 이 지사 문제를 방관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 “이 지사에 관한 문제는 개인적인 사안이 많다. 당에서 개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당 주류에서 의도적으로 이 지사를 배척하거나 돕지 않는 건 아니라고 본다.”
“정부, 경제 어렵다고 솔직히 말해야”
이야기는 친문 중심의 당 운영 문제로 이어졌다. 지난 1월 무소속 손금주ㆍ이용호 의원이 입당을 신청했다가 불허된 게 친문 주류의 반발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들이 대선과 지방선거 기간에 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후보를 공격했다는 게 주된 결격 사유였다. 당시 비주류 의원들(우상호 등) 사이에선 당내 ‘친문 순혈주의’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정 의원은 “과거 이력에 얽매이기보다는 지금 당의 노선과 입장을 같이한다면 함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당의 처리 과정이 전체적으로 아쉽다”고 말했다. “당이 이너서클을 형성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외연을 계속 확장해야 한다”는 게 정 의원 생각이다.
국회 기재위원장실에서 정 의원을 다시 만나 경제 정책에 관해 물었다. 국회 기재위원장은 그동안 한국당 계열이 주로 맡아왔다. 민주당 쪽 기재위원장은 1949년 민주국민당 홍성하 의원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기재위의 피감기관으로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이 있다.
- 바닥 민심을 어떻게 보나.
- “다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토로한다. 장사 좀 잘 되게 해 달라, 일자리에 신경 써 달라는 불만들이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 “지금 경제가 어렵지만 극복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적폐 수사, 야당 표적으로 한 적 없다”
그는 하락세를 보이는 당(黨)ㆍ청(靑) 지지율의 원인으로 경제 상황을 지목했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가장 뼈아파 했다. 정 의원은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과속이었다. 소상공인, 자영업자뿐 아니라 근로자도 불만이 많다”며 “주 60~70시간 일해서 돈 더 벌고 싶은 근로자가 많은데 지금은 고용주가 비용 부담에 못하게 한다”고 했다.
-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궤도 수정이 필요한가.
- “소득을 높이는 정책 중 하나가 최저임금 인상이었다. 방향은 맞다. 하지만 지난해 16.4%, 올해 10.9% 등 과속이었다. 이건 현장에서도 수용하기 어렵다. 그만큼 경제성장이 된 것도 아니고. 적용 범위도 업종별, 지역별로 차등을 두는 방안 등을 검토했어야 했다."
- 누구 책임인가.
- “누구 탓을 하겠나. 개인적으로는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참 무책임했다는 생각이 든다.”
- 장하성 전 정책실장이 주중대사로 가게 됐다.
- “하하하. (한동안 말을 안 함)”
- 문 대통령의 인사를 두고 ‘자기 사람 돌려쓰기’란 지적이 나온다.
- “대통령의 인사 문제에 대해 여당 의원이 언급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다만 당사자들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사양할 수 있는 사양지심이 필요하다. 이 정도만 하겠다.”
정치권에선 문 대통령이 지난 18일 '김학의 성 접대 의혹' 등을 거론하며 철저한 수사를 주문한 것을 두고도 공방을 벌이고 있다. 한국당에선 “다시 적폐몰이에 나섰다”(나경원 원내대표)고 반발하는 중이다.
정 의원은 적폐 수사 논란에 대해 “피로감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다만 적폐 수사가 야당을 표적으로 한다고 보진 않는다. 현 정부에서 그런 수사를 한 적도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적폐 수사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국민 기대에 부응하는 차원”이라고 부연했다.
“文,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공정하게 하려 노력”
- 문재인 정부는 더 정의로운가.
- “역사가 평가할 문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그렇게 했겠나. 다만 그분은 측근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 또 많은 것을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 사실 아닌가.”
정 의원은 무엇보다 성과가 중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논의와 협상 과정이 있었더라도 성과가 없다면 국민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게 그의 정치 철학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야당의 비협조로 문재인 정부의 개혁 법안들이 국회 문턱을 못 넘고 있는 현 상황을 아쉬워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2014년 원내수석을 하면서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최경환ㆍ윤상현)와 협상을 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을 비롯해 3번의 국정조사, 2번의 청문회를 관철했다. 정 의원은 윤상현 의원과는 부부 동반 모임을 할 정도로 여전히 가깝다고 했다. 최경환 의원이 ‘국정원 뇌물 사건’으로 구속되자 탄원서도 썼다.
- 왜 국회는 대치만 하게 되나.
- “자신의 정치 세력만 대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야당은 철저하게 진영 논리에 입각해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있다. 민주당도 그런 면에선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민주당 지도부에게 한 말씀 한다면.
- “여당이 다 가지려고 하면 안 된다. 51%의 실리만 가지면 되고 나머지는 양보해야 한다. 야당에도 명분을 줘야 한다. 국회가 타협점을 내야 대통령의 성과가 국민에게 전달된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