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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몸의 진화, 출산과 건강을 맞바꿨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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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호 20면

자궁이 아이를 품은 날

자궁이 아이를 품은 날

자궁이 아이를 품은 날
그라지나 자시엔스카 지음
김학영 옮김
글항아리/사이언스

여성 신체, 출산·양육에 치중 #남성보다 질병 예방 어려워 #진화와 여성건강 관계 연구 #반짝 유행 건강법 의미 없어

유방암·심장병·골다공증에 걸리면 ‘건강하게 사는 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내 잘못일까? 진화생물학자 겸 진화보건학자인 지은이는 ‘아닐 수 있다’에 방점을 찍는다. 진화생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의 신체·생리 기능은 질병 감소와 건강 장수가 아닌, 다음 세대의 출산과 양육에 초점을 맞춘다. 지은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질병을 예방하기가 더욱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진화 과정에서 얻게 된 이런 특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건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에게 특정 질환이 더 많은 것은 문화적·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여성이 일방적으로 생존에 불리한 것은 아니다. 예로 수정에 관여하는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젠의 수치가 높으면 생식에 유리하다. 하지만 유방암을 비롯한 암 발생률을 높인다. 대신 골다공증·심장병·우울증·치매 같은 노인성 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낮춰준다. 에스트로젠은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는 호르몬이다. 지은이는 이런 신체 메커니즘을 ‘거래’로 표현한다. 진화생태학은 이러한 거래를 바탕으로 만능건강법은 없다고 경계한다. 이것만 열심히 하면, 저것만 피하면, 그것만 먹으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식의 ‘반짝 유행성’ 건강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기존 의학과 보건학에 더해 진화생물학의 지혜를 빌리면 질병의 치료와 예방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인도주의적 지원에도 활용할 수 있다. 1960년대 영국 의학연구위원회와 케임브리지대의 던 영양연구소는 아프리카 감비아 어린이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임신부 영양보충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특히 저체중아는 사망률이 높으므로 영양 보충을 통해 출산아의 체중을 늘리려고 했다. 하지만 보충식을 먹은 여성에서 태어난 아이의 평균 체중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겨우 50g 많았을 뿐이다. 하지만 후속 연구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영양보충을 받은 여성은 다음번 임신까지 간격이 확 줄어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산모의 몸이 출산 간격을 줄여 더 많은 ‘생존 후손’을 낳는 진화생물학적 선택을 한 셈이다.

여성의 몸은 진화의 결과 출산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사용하도록 설계됐다. 출산기 이후의 건강은 진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진 글항아리]

여성의 몸은 진화의 결과 출산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사용하도록 설계됐다. 출산기 이후의 건강은 진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진 글항아리]

진화생물학은 성인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데 유효한 도구이기도 하다. 태아 시절 영양이 모자랐던 사람은 성인이 된 뒤 당뇨·심혈관질환·뇌졸중 등 대사성 질환의 발병률을 높다는 것은 이미 의학적으로 입증됐다. 이처럼 태아의 발육기가 성인기의 생식·생리 기능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을 ‘태아 프로그래밍’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한 연구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기아를 경험한 네덜란드의 태아와 수유기 어린이를 대상으로 수십 년에 걸쳐 수행한 장기관찰 연구다. 이들은 50대가 됐을 때 인슐린 대사가 활발하지 못해 당뇨와 관상동맥성 심장질환 발병률이 높았으며 비만도 많았다. 태아기에 기아를 겪은 아이들의 체중은 출생 당시에는 물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면서 성장한 뒤에도 평균보다 가벼웠다.

진화생태학자들은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성인병은 생활습관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한다. 기아 상태의 자궁에서 발육한 태아의 몸이 출생 뒤에도 이를 기억해 미래에 생길지 모를 열악한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생리와 대사 기능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의학·보건학·영양학·생리학 연구와 다소 결이 다른 연구와 해석 결과다. 지금까지 우리가 과학과 의학 지식으로 알고 있던 수많은 건강과 인체 관련 연구에 이러한 진화생태학·진화생물학 연구를 보태면 인류의 지식 창고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지은이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진화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폴란드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대 보건학 연구소에서 일한다. ‘여성의 생물학과 건강에 대한 진화론적 관점’이라는 부제가 책의 핵심을 요약한다. 원제는 ‘The Fragile Wisdom’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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