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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13만원짜리 책의 작은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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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요즘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날 갑자기 70대 할머니로 늙어버린 25세 김혜자(극중 이름도 김혜자)의 연기가 빛난다. 잃어버린 청춘과 덧없는 노년을 넘나드는 그의 서글픈 얼굴에 공감이 간다. 지금 여기, 한국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다. 드라마에서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다. 혜자의 오빠 영수(손호준)다. 겉으론 1인 크리에이터지만 속으론 찌질이 백수다. 컴퓨터 앞에서 서 푼짜리 먹방쇼를 펼치며 온라인 구독자의 별풍선(후원금)을 노린다. 물론 반응은 싸늘하다. 그의 허접스런 방송에 비아냥이 쏟아진다.

정신분석학 고전 라캉의 ‘에크리’ 25년 만에 완역 #명품가방·시계처럼 값비싼 인문학도 때론 필요해

영수 이야기를 꺼낸 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1901~81)의 욕망이론이 생각나서다. 라캉의 주저 『에크리(ÉCRITS)』를 최근 완역한 조형준씨가 한번 읽어보라고 권유한 게 계기가 됐다. 거칠게 요약해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사회· 제도)이 불어넣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영수도 유튜버·먹방이라는 시대의 욕망에 매몰된 꼴이다. 남을 따라 일확천금을 꿈꿀 뿐 어떻게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인간이니, 무조건 욕망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에크리’는 프랑스어로 ‘글로 쓰인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의지의 존재’ ‘주체적 존재’라는 서양 근대철학을 부정한다. 무의식·욕망에 흔들리는 우리를 주목한다. 능동이 아닌 수동의 인간이다. 하지만 책 자체는 난공불락이다. 한 페이지도 넘기기가 어려웠다. 20세기 인문학을 지배한 정신분석학 경전(經典)이라지만 소문대로 난해의 최고봉쯤 됐다. 용어 하나, 도식 하나가 수수께끼와 다름없었다. 분량도 무려 1092쪽. 문외한에겐 이런 흉기도 따로 없다.

조형준씨의 설명을 들으니 조금 이해도 된다. 번역에만 무려 25년이 걸렸다. 그것도 한두 명이 매달린 게 아니다. 책에는 모두 네 명이 역자가 소개돼 있다. 중간에 포기해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라캉 자신이 워낙 언어를 다의적으로 사용하고, 또 지식의 폭과 깊이가 엄청나기에 번역 자체가 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죽는 줄 알았다”고 돌아봤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조씨는 왜 이 책에 25년을 바쳤을까. 원작이 처음 나온 해는 1966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잇는 걸작이자, 웬만한 학자라면 인용 한두 번 안 한 적 없는 명저인데다, 심지어 고교 논술 지문에도 등장하는 소문난 책인데도 정작 내용 전체는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우리 학계·출판계에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요약·해설본이 아닌 라캉의 맨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프랑스 원본을 토대로 영어본·독일어본을 한 구절 한 구절 대조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즐거운 지옥’을 통과했고 ‘지적 오르가슴’을 경험했다.

학계는 일단 호의적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라캉은 고도의 메타포를 사용한다. 문학·심리학·자연과학 등 20세기 모든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우리도 인문학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만시지탄(晩時之歎)도 있지만 귀동냥·입동냥으로 말해온 라캉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역자들의 숨은 노력이 한국 인문학에 작은 희망이 된다”고 환영했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다. 과연 이런 책을 누가 볼까. 또 얼마나 팔릴까. 번역자 조씨는 “끝까지 읽어낼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외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프랑스인조차 이해 못 하는 대목이 있다. 지식계의 에베레스트쯤 된다. 하지만 산이 높다고 포기할 건 아니다. 최소한 동경은 할 수 있다. 인문학은 그런 고통의 과정이다”고 답했다. TV·강연에서 쉽게 떠먹여 주는 예능인문학이 공부의 본령이 아니라는 항변이다.

부연 사항 하나. 『에크리』 책값은 13만원이다. 서점가에선 “비싸다” “부담스럽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25년간의 노고를 감안하고 분량도 일반 단행본 다섯 권에 맞먹으니 딱히 책잡을 건 아니다. 놀라운 건 발간 3주 만에 700부 가까이 팔렸다는 사실. 라캉의 명성에 원작에 대한 지식계의 갈증이 가세한 모양새다. 지방 공부모임에서 많이 사 갔다는 후문이다. 초판 1000부도 소화하기 어려운 게 요즘 인문학 책의 현주소, 패스트푸드 책만 잘 나가는 출판시장에 매서운 훅 한 방을 날렸다.

조씨는 “전혀 예상 못 했다. 기적 같다”고 즐거워했다. “감사할 뿐이다. 기회가 되면 완독자 모임을 열고 싶다”고 했다. 역시 알다가도 모를 게 한국사회다. 불가사의한 에너지다. 이런 지적 사치를 껴안을 만큼 우리가 성숙한 것일까.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돈이든, 지식이든 인간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다. 그 욕망이 우리를 앞으로 끌어간다. 라캉은 숱한 정신과 환자들을 만나며 그런 욕망의 복잡다단한 이면을 탐구했다. 제2, 제3의 『에크리』가 나왔으면 한다. 명품은 가방·시계에만 있는 게 아닐 테니까….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