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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인 제가 왜 유럽 공주로 변신하고 찰칵~ 했을까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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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호 22면

여장남자 시리즈 출간한 사진가 배찬효

배찬효의 ‘의상 속 존재-신데렐라’(2008) 부분.

배찬효의 ‘의상 속 존재-신데렐라’(2008) 부분.

황금 마차 옆에 로코코 드레스를 입은 공주. 신데렐라 영화의 한 장면일까. 그런데 신데렐라 얼굴이 좀 이상하다. 하얗게 분칠하고 금빛 가발을 썼지만, 동양 남성임에 틀림없다. 이 사진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 배찬효(44)의 작품으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다. 그는 연극이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정교한 세팅에 동화 속 공주나 영국 역사 속 왕과 여왕을 배치한 ‘의상 속 존재’ 연작(2005~2016)으로 국내외에 잘 알려져 있다. 최근 한미사진미술관이 작가의 기존 연작과 새로운 연작 ‘서양화에 뛰어들기’ 중 52점을 골라 첫 사진집 『EXISTING IN COSTUME』을 출간했다.

여성성에 대한 단순한 냉소 벗어나 #여자+동양남자인 ‘타자’ 표출하며 #서구 남성중심 문화에 반기 든 것 #치밀한 장소 섭외, 복장 고증은 기본 #동화 분위기 찾으려 영국 곳곳 누벼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출간된 사진집 『EXISTING IN COSTUME』표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출간된 사진집 『EXISTING IN COSTUME』표지.

사진집을 펼쳤다. ‘자화상’ 연작(2005~2007)에서 작가는 거창한 메디치 칼라를 두른 엘리자베스 1세가 되어 군번 줄을 들고 있다. ‘동화책’ 연작(2008~2010)에서는 좀더 화려한 배경에서 ‘개구리 왕자’의 공주 혹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로 변신한다. ‘처형’ 연작(2011~2012)에서는 앤 불린, 메리 스튜어트, 찰스 1세가 되어 피를 흘린다. ‘마녀사냥’ 연작(2013~2016)에서는 마녀가 되어 신비한 숲 속에서 꽃과 물통을 공중부양시킨다.

유럽 사극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연출 사진

‘서양화에 뛰어들기-성모 승천, 마테오 디 조바니’(2018).

‘서양화에 뛰어들기-성모 승천, 마테오 디 조바니’(2018).

일단 장면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놀랍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촬영을 위해 영국 각지의 문화유산급 저택·고성·성당을 섭외하고, 의상은 영국 국립극단(National Theatre)에서 철저한 고증에 따라 재현한 것을 대여했기 때문이다.

“‘동화책’ 연작의 경우, 7가지 동화 장면을 먼저 구상해 놓고 장소를 찾았어요. ‘백설공주’부터 시작했는데, 제가 구상한 숲 속 시냇물이 흐르는 옆에 초가집이 있는 장소는 영국에 없다는 걸 몇 개월간 헤매고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대신 ‘신데렐라’를 찍으려고 마차를 구하기 시작했는데, 촬영하고 싶은 마차가 하나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돼 있더라고요. 하지만 운 좋게 영화 촬영용 마차 120대를 보유한 영국 회사를 알게 되었고, 그 중 제가 생각한 마차가 딱 하나 있었죠. 이런 식으로 2009년 한 해 동안 최선을 다한 결과 4장의 사진을 촬영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고생과 준비 덕분에, 결과물은 허술한 패러디로 보이지 않고 잘 만든 할리우드나 유럽 사극영화의 한 장면 같다. 게다가 주인공 여성 역할을 동양 남성인 작가 자신이 하니 기이하고 미스터리한 느낌이 가중되는 것이다.

‘서양화에 뛰어들기-마르스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미네르바, 페터 파울 루벤스’(2017).

‘서양화에 뛰어들기-마르스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미네르바, 페터 파울 루벤스’(2017).

그가 왜 이런 사진을 찍는 것일까. 사진집에 실린 사진 평론가 빌 쿠벤호벤과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의 평문, 그리고 작가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분석했다. 작업의 시작은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영국의 명문 미대인 런던대 슬레이드 예술학교 대학원에 가서 “외국 학생으로서, 즉 이방인으로서,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경험”을 하면서였다. “그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을 해서, 분리되었다고 느껴진 그룹을 닮음으로써, 소외감을 최소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미 한국에서 서구화된 제도를 통해 서구 학문과 예술을 이론적으로 공부했음에도 정작 서구에 가서는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에서, 작가는 아예 자신의 몸을 서구 문명의 근간인 동화와 셰익스피어 시대 속에 집어넣어 경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평론가 쿠벤호벤은 이렇게 설명한다. “서구의 철학자와 인류학자들이 그들에게 낯선 문화를 ‘타자’로 지칭함으로써 이를 분석하려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배찬효는 ‘서구적’ 표준을 뒤집어 개인적이며 비서구적인 시점으로 ‘서구’를 ‘타자’로 관찰하면서 관점에 대한 반전을 꾀한다.”

“타인으로서의 존재를 여성으로 표현할 뿐”

‘의상 속 존재-잠자는 숲 속의 미녀’(2009).

‘의상 속 존재-잠자는 숲 속의 미녀’(2009).

그런데 그는 왜 작품에서 여장남자가 되는 것일까. 쿠벤호벤은 평론가 데이비드 볼저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배찬효는 퀴어나 동성애에 관심이 없다. 그의 여장은 여성성의 냉소적 우상 숭배나 연극적 과장이 아니다. 작가 자신의 말대로 ‘타인으로서의 존재를 표현해보고자 하는 것’ 뿐이다.” 흔히 남성의 여장은 여성성을 과장하거나 희화화해서 표현하는 것에 비해, 배 작가가 여장한 모습은 “무미건조한 표정과 냉랭한 부동의 자세로 관객과의 거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평론가 김홍희의 설명이다.

배찬효 작가

배찬효 작가

김 평론가는 배 작가가 영감을 받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인용하며 남성 중심의 서구 문명에서 여성은 동양과 마찬가지로 ‘타자’이며 멸시와 동경의 대상으로서 판타지가 덧입혀지고, 그러한 시각의 문학·예술에서 흔히 ‘동양적임’과 ‘여성적임’이 겹쳐진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여장을 한 작가의 모습은 서구 남성중심 문명 체계에서 ‘타자’가 된 모든 정체성(여자+동양남자+기타 등등)의 혼종으로서의 자화상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모든 타자들의 결합으로서 작가의 자화상은 ‘마녀사냥’ 연작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종교적 광기와 여성혐오 등 모든 ‘미지의 타자’에 대한 편견과 증오가 뭉쳐져 나타난 것이 잔혹하고 불합리한 마녀사냥이었으니 말이다.

‘의상 속 존재-헨리 8세’(2012)

‘의상 속 존재-헨리 8세’(2012)

‘의상 속 존재’ 연작의 진화에 관한 배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처음 자화상 작업을 할 때는 ‘소외감’과 ‘개인적 정체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영국 여왕이나 귀부인으로 분장을 하고도 소주병·군번 줄·장난감 등을 들고 있는 이유는 한국인으로서의 직접적인 기억과 문화의 상징물을 ‘잡는다’는 것, ‘놓쳐서는 안될 것 같은…’ 것의 의미였죠. 당시 ‘잡고 싶다’는 ‘찾고 싶다’와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반면 ‘동화책’부터 ‘마녀사냥’까지는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제3자 입장에서 ‘서양사회 속 동양남자의 위치’와 ‘편견’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기를 시도하다 보니 저의 정체성적인 부분보다 사회의 객관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나의 이야기에서 사회의 이야기로 변형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가는 새로운 연작 ‘서양화에 뛰어들기’를 통해 진화를 거듭했다. 옛 서양 명화를 복사 촬영한 후 가죽 위에 전사하고, 인화한 사진 위에는 금박도 씌웠다. “무의식에 집중하고, 자유롭고 싶은 욕망과 내려놓음에 집중했습니다. 부당함의 정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정의하기 힘든 복잡함에 ‘질문하기’를 시도하며, 감정과 표현에 집중한 결과물입니다.” 작가는 8일 런던 퍼디 힉스 갤러리에서 새 시리즈를 보여주는 개인전을 시작했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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