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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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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호 29면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지난 6일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베를린 음식이 위험한 이유’라는 생소한 문구가 떴다. 처음엔 그 지역에 대규모 식중독 사태가 벌어진 줄 알았다. 기자적 참견 시점에 호기심이 발동해 클릭해 보니 정답은 ‘독일 수도’였다. 독일의 수도가 어쨌다고? 이런 게 왜 검색어 1위? 게다가 베스트 댓글을 보니 ‘독일지도’라는 네 글자에 베를린을 강조한 독일의 지도가 첨부돼 있었다. 이건 또 뭐임? 그렇다고 나의 무지를 탓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처음엔 같은 느낌이었단다.

집단 무기력증, 대화 실종 식물국회 #유머는 간데없고 독설·막말만 난무 #‘15년 새 최악 지각’ 일손 놓은 여야 #“미세먼지만 못해” 비판 어찌할 건가

알고 보니 아재 개그였다. 독(毒)으로 끊어 읽고 나니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허탈은 했지만 뒷맛이 나쁘진 않았다. 아마도 일주일째 계속된 최악의 미세먼지에 마음까지 찌뿌둥한 상황에서 썰렁한 유머 한 꼭지가 뜨자 다들 자연스레 눈길이 가지 않았나 싶다. 춘래불사춘. 설레는 봄이 왔건만 주위는 온통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암울한 잿빛 도시로 변해 있으니 본능적으로 유머라는 탈출구, 마음이 숨쉴 통로를 찾지 않았나 싶다.

독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서양에서는 유머 중에서도 특히 정치인들의 유머가 널리 회자돼 왔다. 에이브러햄 링컨, 윈스턴 처칠, 샤를 드골, 로널드 레이건 등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업적 못지않게 유머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다. 스티븐 호킹이 55년간 온몸이 마비되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인생이 재미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라고 왜 틈만 나면 강조했는지, 그 이유를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거다.

학창 시절 즐겨 읽었던 책 중 하나는 링컨의 유머 모음집이었다. 그중 한 토막. 링컨의 못생긴 얼굴은 정적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한 유세에서 상대 후보가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며 몰아세우자 링컨이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내가 정말 두 얼굴을 가졌다면 이토록 중요한 자리에 왜 하필 못생긴 얼굴을 갖고 나왔겠습니까.” 193㎝에 달하는 큰 키도 놀림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기자가 “사람에겐 어느 정도가 적당한 키라고 생각하느냐”고 짓궂게 묻자 링컨이 대답했다. “땅에 닿을 정도면 딱 적당하죠.”

우리 정치도 예전엔 나름 이런 풍류가 있었다. 박희태·박상천 대변인의 논평 대결은 기사 쓸 맛이 났다. 고 노회찬 의원의 ‘삼겹살 판갈이’ 발언 등 금도는 지키되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도 적잖았다. 정치인 인터뷰에 유머가 빠지면 ‘정치 고수’ 대접을 못 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두들 근엄하고 콧대 높은 표정에 유머는 온데간데없고 살벌한 독설과 막말·망언만 난무하고 있지 않나. 여의도 국회는 툭하면 개점휴업에 삭막한 정적만 감돌고 있지 않나.

‘15년 만의 최악 지각’이란 오명을 쓴 3월 임시국회가 지난 7일에서야 개회했다. 올해 처음 열린 국회다. 참 빨리도 열었다. 장외에서 막말 공방을 벌이던 여야 의원들이 미세먼지에 목이 막히자 이제야 공기 좋은 실내로 들어왔나 보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의 정치판이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무능하고 무기력한 이유’는 한정판이어서라는 시니컬한 유머가 검색어 1위에 오르지 말란 법도 없다. 이런 미세먼지만도 못한 정치를 감내해야 하는 유권자들이야말로 극한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런 정치는 없었다. 이것은 감동인가, 예술인가.” 살아생전에 이런 얘길 듣는 건 정녕 헛된 꿈인가.

이래서는 의원들이 내년 총선에서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외쳐봐야 별무소용일 터다. 아무리 망각의 마법이 강력하다 해도 20대 국회의 역대급 무책임은 잊혀지기가 결코 쉽지 않을 터다. 집단 무기력증에 대화는 실종된 식물국회, “진영과 지역에 기대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민생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인들에게 유권자들은 이렇게 묻고 싶은 심정일 터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냉엄한 심판, 진정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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