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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싸늘, 정부·지자체 3인1조 압박…한유총 못 버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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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유치원 3법’ 등에 반대하며 한유총이 ‘개학 연기 투쟁’에 나선 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유치원으로 아이들이 등원하고 있다. 한유총 광주지회는 이 지역 159개 사립유치원이 모두 정상적으로 개학했다고 밝혔다. [뉴스1]

‘유치원 3법’ 등에 반대하며 한유총이 ‘개학 연기 투쟁’에 나선 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유치원으로 아이들이 등원하고 있다. 한유총 광주지회는 이 지역 159개 사립유치원이 모두 정상적으로 개학했다고 밝혔다. [뉴스1]

사립유치원 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개학 연기 투쟁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한유총이 투쟁 하루 만에 ‘조건 없는 철회’를 결정하면서 우려됐던 유치원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유총의 집단행동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한유총 백기 들기까지 #정부, 여론 업고 “개원 연기는 불법” #대검 공안부 “엄정 대응” 거들어 #‘한유총 법인 취소’ 방침이 결정타

전문가들은 여론전의 실패를 주원인으로 꼽았다. 2016년과 2017년 한유총은 정부의 재정지원 증액, 국공립 유치원 확대 정책 폐기 등을 내세우며 ‘집단휴업’을 예고해 소기의 효과를 봤다. 당시 교육부는 한유총에 끌려가며 휴업을 막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와 싸우겠다면서 ‘개학 연기’라는 악수를 통해 학부모까지 적으로 돌린 꼴”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과거엔 ‘집단휴원’ 같은 으름장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사립유치원 비리에 대한 국민 여론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강경 대응은 오히려 화만 키웠다”고 지적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도 “현행법과 국민 정서상 유치원은 학교이고, 원장은 교육자인데 아이들의 학습권을 버리고 투쟁하니 누가 편을 들어주겠냐”고 반문했다.

같은 날 개학하지 않은 서울 도봉구의 한 유치원을 방문한 장학사가 현관에 시정명령서를 부착하고 있다. 한유총은 이날 오후 이덕선 이사장 명의로 보도자료를 내 ’개학 연기 사태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개학 연기 투쟁을 조건 없이 철회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같은 날 개학하지 않은 서울 도봉구의 한 유치원을 방문한 장학사가 현관에 시정명령서를 부착하고 있다. 한유총은 이날 오후 이덕선 이사장 명의로 보도자료를 내 ’개학 연기 사태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개학 연기 투쟁을 조건 없이 철회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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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정부는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일관된 압박 전략을 사용했다. 특히 처음 한유총의 ‘개학 연기’ 방침이 발표되자 교육부는 ‘개학 연기=불법’으로 규정했다. 지난달 28일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유아와 학부모를 볼모 삼아 단체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은 교육자로서 책임을 버리는 일이며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했다.

이런 프레임을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은 검찰이다. 다음 날인 1일 대검찰청 공안부는 “무기한 개학 연기는 교육 관계 법령에 위반될 소지가 크므로 향후 발생하는 불법행위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렇다 보니 ‘개학 연기’를 결심했던 일선의 유치원장들 입장에선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덕선 한유총 이사장은 4일 ‘개학 연기’ 철회 입장을 밝히면서 “불법이라고 여론몰이를 하고, 경찰과 시청·교육청 공무원이 3인 1조가 돼 압박하다 보니 현장의 혼동과 불안이 가중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3일 개학 연기 입장을 표명했던 유치원은 전국 381곳이었지만 4일 실제 개학을 연기한 곳은 239곳이었다. 지난달 28일 한유총이 처음 밝혔던 개학 연기 참여 유치원 규모(2000여 곳)과는 비교가 안 된다.

김철 한유총 홍보국장이 4일 한유총의 개학 연기를 조건 없이 중단한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김철 한유총 홍보국장이 4일 한유총의 개학 연기를 조건 없이 중단한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개학 연기’ 사태 후 학부모들의 부정적 반응도 한유총으로선 큰 부담이었다. 이날 ‘개학 연기’에 참여한 유치원을 중심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선 학부모들의 비판이 잇따랐다. 심지어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해당 유치원을 비판하는 글이 오르기도 했다. 특히 이덕선 이사장이 운영하는 경기도 R유치원의 학부모들은 “일방적인 개학 연기는 명백한 학습권 침해”라며 이 이사장을 상대로 소송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12월 설립된 또 다른 유치원 단체인 한국사립유치원협의회(한사협)의 존재도 한유총의 힘을 약화시켰다. 한사협은 한유총에서 갈라져 나온 700여 명의 회원으로 이뤄진 단체다. “한사협과는 꾸준히 대화하고 있다”는 교육부 당국자(권지영 유아교육정책과장)의 말처럼 한사협이 정부와 교육청의 대화 파트너로 인정받으면서 한유총 지도부의 힘을 뺐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서울시교육청의 한유총 법인 취소 움직임이었다. 전날 이재정(경기)·도성훈(인천) 교육감과 함께 공동 기자회견에서 강력 대응 입장을 밝혔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4일 오후 한유총에 대한 법인 취소 방침을 발표했다.

공식적인 법인 취소 방침은 5일 한유총에 통보된다. 이후 한유총의 해명을 듣는 청문 절차가 이뤄진 뒤 최종적인 법인 취소 여부가 결정된다. 한유총은 처분 결정을 고지한 날부터 90일 또는 처분 조치가 이뤄진 날부터 180일 안에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취소가 결정되면 청산 절차가 진행된다. 이때 한유총의 잔여 재산은 주무관청인 서울시교육청으로 귀속된다. 잔여 재산은 약 5000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법인으로서의 법적 지위만 상실될 뿐 단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한유총이 사립유치원 단체로서의 대표성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법인이 취소되면 한유총은 개인 친목단체로 전락한다. 다수의 회원이 탈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향후 사립유치원과 정부 간 논란의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김정호 전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정부는 사립유치원을 공공의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사립유치원은 명백히 개인이 설립한 사유재산”이라며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명쾌하게 이뤄지지 않는 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만·전민희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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