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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미국서 배워온 스크럼, 판교선 직원 쪼는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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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본 판교 #수평문화 만든다며 영어 이름 써 #“피터님께서” 희한한 존칭 #대표는 열정페이, 직원은 워라밸 #동상이몽이 높은 이직률 원인

신분당선 판교역 1번 출구는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지난달 20일, 오후 6시가 넘어가자 퇴근하려는 인파들이 속속 1번 출구로 모여들고 있다. [박민제 기자]

신분당선 판교역 1번 출구는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지난달 20일, 오후 6시가 넘어가자 퇴근하려는 인파들이 속속 1번 출구로 모여들고 있다. [박민제 기자]

지난해 창비 신인상을 받은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요즘 판교테크노밸리 스타트업 종사자들 사이에 필독서로 꼽힌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발원한 첨단 기업문화가 한국 판교에 이식되면서 변질된 풍속도를 정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스타트업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소설”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지난해 10월 창작과비평 홈페이지에 공개된 소설 누적 조회 건수는 22만1810건(지난달 21일 기준)에 이른다. 소설 분량은 A4용지 12장. ‘우동마켓’이라는 가상의 중고거래 앱을 서비스하는 판교 소재 스타트업이 배경이다. 이 짧은 소설 속 어떤 부분이 7만여명 판교인들의 심금을 울린 걸까.

우선 회의문화 관련 한 토막.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장류진

장류진

“(전략)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스크럼이라면 이 모든 과정이 길어도 십오분 이내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우리 대표는 스크럼을 아침조회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심히 문제였다. 직원들이 십분 이내로 스크럼을 마쳐도 마지막에 대표가 이십분 이상 떠들어대는 바람에 매일 삼십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일의 기쁨과 슬픔』 1페이지)

스크럼은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유행한 프로젝트 관리기법 중 하나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각자 맡고 있는 분야를 이야기하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회의다. 효율적 관리 기법인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한국에선 ‘용도 변경’ 됐다. 개발자 이모(31)씨는 “대표가 회의를 진행하면서 소위 ‘쪼는’ 시간으로 변질됐다.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적 토양에선 미국식 방법론이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소설은 영어 이름 사용이 만든 ‘희한한 현상’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씰리콘밸리가 아니고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하지만 다들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 2페이지)

스타트업 근무 경험이 있는 남모(30)씨는 “이름만 영어로 부른다고 수평적이 되지 않는다. 유교 문화권인 탓에 소설처럼 ‘리처드 대표님’ 이렇게 부르는 일이 현실에선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홍보 대행을 맡고 있는 박모(29)씨는 “메신저로 대화할 때 ‘peter nim’(피터 님) 처럼 한국 존칭을 붙이는 일도 벌어진다”고 했다.

판교는 소위 ‘개발자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실상과 얼마나 부합할까. 소설은 이렇게 꼬집는다.

“대표가 케빈에게 내민 카드는 ‘개발적으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겠다’였다. 겨우 그런 말로 설득을 한 것도 신기했지만 고작 그런 말로 설득이 된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래서 케빈은 지금 ‘개발적으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나 모르겠다. 매일 나오는 버그 잡기 바쁜 거 같은데.”(『일의 기쁨과 슬픔』 8페이지)

스타트업 두곳에서 근무 경험이 있는 이모(25)씨는 실상을 이렇게 전한다. “전 직장의 총 직원이 3명이었다. 마케팅 분야를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업무 범위가 너무 넓었다. 투자회의 통역, 발표, 소송을 위한 법률 자료도 직접 번역했다. 심지어 대표의 휴대전화 보험금 수령이나 골프채 빌리기 등 사적인 지시도 따라야 했다”. 적어도 알려진 대로 개발자 천국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실리콘밸리 시늉, 실상은 너무 다른 판교 풍속도

그렇다면 성공이라는 목표에 대해서는 창업자와 직원이 한마음이지 않을까. 소설과 현실은 이마저도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저희 대표나 이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하겠죠? 어떻게 돈 끌어오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3퍼센트의 성공한 스타트업이 될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느라 걱정이 많을거에요.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하게 되더라고요.”(『일의 기쁨과 슬픔』 9페이지)

부모 집 창고를 빌려 마음 맞는 동료들끼리 창업해 몇달간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만든 제품·서비스가 대박 나면서 주식 부자가 되는 얘기는 실리콘밸리의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다. 하지만 창업자에게 회사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게 지상과제라면 직원에겐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1년 6개월간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한 이후 2017년부터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 최모(28)씨는 대표와 직원이 서로 꿈꾸는 스타트업에 대한 이미지가 충돌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표 등 초기 멤버와 이후 들어온 직원들은 스타트업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초기 멤버들은 크게 성공해 돈을 벌려고 불안전성을 감수하고 자기 빚까지 져가며 창업을 한다. 이들에게 스타트업은 40시간씩 잠도 자지 않고 열정을 불사르며 일하는 곳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실리콘밸리에선 오후 5시에 퇴근한다는 등 워라벨을 기대하고 온 사람이 많다. 스타트업 대표들 모인 강의에 나가보면 ‘직원들 똑똑해보여서 뽑아 놓으면 자꾸 나간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구요. 그게 다 양쪽이 스타트업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그런 거예요.”

이쯤되면 소설의 작가과 집필 의도가 궁금해진다. 장류진(33) 작가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재취업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내가 일해온 공간,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 이를 소설로 쓴 것”이라며 “절대 부조리함을 고발하거나하는 의도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도 판교 인근 IT기업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일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감정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일을 하면 월급을 받는다던지 파생되는 인간관계가 생긴다던지, 내가 뭔가 기여하고 있다는 자존감을 얻는다던지 등 기쁨이 크다. 하지만 그것을 빼고는 슬픈 것들도 너무 많다. 월요병도 그래서 생긴 것 아닌가. 판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판교=박민제·편광현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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