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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당시 국내 최초 대학은 어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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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에서 수학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 [중앙포토]

이화학당에서 수학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 [중앙포토]

3·1 운동 당시 국내에는 어떤 학교들이 있었을까. 1910년 주권을 빼앗긴 당시 조선은 근대교육기관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고등교육의 발전이 가로막혀 있었다. 지식인들이 배출될수록 식민통치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일종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다.

 그러나 뜻있는 애국지사들의 노력으로 전국 각지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비롯한 각종 근대식 교육기관이 문을 열었다. 실제로 3·1 운동이 있던 1919년 당시에는 전국에 517개의 보통학교가 있었다.

 28일 종로학원하늘교육이 분석한 식민조선의 교육현황 자료에 따르면 당시 보통학교 재학생은 8만9288명이었다. 전체 취학 대상 아동(228만명 추정)의 3.9%였다. 오종운 종로학원하늘교육 평가이사는 “국내 일본인 아동의 취학률(91.4%)과 비교하면 23배나 차이난다”며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해 교육을 통한 지식인의 성장을 막았다”고 설명했다.

영화 '동주'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음악 수업 모습. 윤동주(왼쪽)와 송몽규(가운데).  [메가박스플러스엠]

영화 '동주'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음악 수업 모습. 윤동주(왼쪽)와 송몽규(가운데). [메가박스플러스엠]

 당시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은 전문학교(전문대학)였는데 6개에 불과했다. 관립은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 등 4곳이었고, 사립은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등 2곳이었다. 6개 학교의 재적 학생은 585명뿐이었다.

 1905년 개교한 보성전문학교와 1910년 개설된 이화학당 대학과도 전문학교에 속했지만 일제는 1915년 이들을 각종학교로 격하했다. 다시 전문학교로 승격된 것은 보성은 1921년, 이화는 1925년이었다.

 국내에서 처음 대학으로 정식인가를 받은 것은 숭실학교다. 1897년 미국의 선교사 배위량(W.M.Baird)박사가 설립한 숭실은 1905년에 대학부를 설립하고 1912년 최초의 대학으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당시 숭실은 평양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보성·이화와 함께 1915년 각종학교로 격하됐다 1925년 전문학교로 개편됐다. 김지현 숭실대 홍보팀장은 “식민지 교육을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면서 오랜 수난을 겪었다”며 “특히 1938년에는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자진폐교를 했다”고 말했다. 숭실은 폐교 16년만인 1954년에 서울 캠퍼스를 재건했다.

일제시대의 서울 중앙고교 모습. [중앙포토]

일제시대의 서울 중앙고교 모습. [중앙포토]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공식 인가된 것은 경성제국대학이다. 1924년 청량리 교사에서 예과과 개교했고 1926년 동숭동에 본과가 신설됐다. 당시 동숭동 일대에는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 불교중앙학원 등 학교가 밀집해 있어 향후 ‘대학로’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명칭이 공식화 된 것은 1966년 서울시가 현재의 혜화동 로터리 일대를 대학로로 고시하면서다.

 세계 최초의 대학은 1088년 이탈리아에 문을 연 볼로냐대학(법학)이다. 영국의 옥스퍼드(1167)나 케임브리지(1209)도 초기 대학에 속한다. 그러나 근대 대학의 시초를 이루는 곳은 1810년 독일에서 개교한 베를린대학이다. 이 때부터 교육과 연구를 중추로 한 근대 고등교육기관의 기틀을 본격적으로 갖췄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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