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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쿨~한 요즘 전당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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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전당포가 있어?" 다들 그런 반응이죠. '1970~80년대에나 있던 게 전당포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하죠. 요즘은 신용카드로 대출을 받는 시대잖아요. 그런데 웬걸요. 막상 찾으려 하니까 가는 곳마다 전당포가 있네요. 서울의 종로와 청담동.압구정동은 물론이고 신촌이나 신림 사거리에도 어김없이 '전.당.포'라고 새겨진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궁금하네요. 요즘 전당포는 어떤지 말이죠. 갓난애를 업고 온 새댁이 우유값이 없어 가락지를 맡기던 시절은 옛말입니다. 학사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신 뒤 돈이 없어 전당포를 찾던 대학생들도 이젠 옛말입니다. 딱하고 애절한 사연들이 줄을 잇던 전당포가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한 건 있네요. 방금 닦은 거울처럼 당대의 세태가 고스란히 보이네요. 2006년의 풍속도, 그 천태만상이 전당포에 담겨 있습니다. 어디 한번 들여다보실래요?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전당포 '단골' 시계의 어제&오늘

명품 전당포 '캐시캐시'의 시계전문 감정사인 장성원(54.동서울대 시계주얼리과.사진) 겸임 교수.

정부에서 주는 '명장 1호' 타이틀을 받은 전문가다. 35년째 시계 감정을 하고 있는 그에게서 '가짜 시계의 역사'를 들어 보았다.

1970년대 초▶명절에 고향 갈 때 손목시계를 차면 성공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땐 날짜판이 있으면 고급시계였다. 그래서 시계판에 네모로 구멍을 내고 종이를 받쳐서 '17'이란 날짜를 새겨 넣곤 했다. 그럼 그 시계는 1년 내내 '17일'만 표시했다. '오리엔트'와 '시티즌' 등 수입한 부품으로 만든 국산 조립시계의 전성기였다.

80년대 초▶70년대 초만 해도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 시계를 샀다. 그런데 전자 시계가 나오면서 가격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결혼 예물로 비로소 시계가 등장했다. '오리엔트 갤럭시' '오메가' '라도' 등의 브랜드가 나오면서 홍콩산 가짜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조악한 수준이라 속일 수도 없었다.

90년대 초▶국민소득 상승과 함께 해외 여행객이 증가했다. 롤렉스 등의 명품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덩달아 모방 제품들이 생겨났다. 롤렉스.불가리.샤넬의 모방 제품은 꽤 고가였다. 전에는 멀리서 봐도 판별이 됐는데 이젠 케이스와 바늘.무게.촉감 등 세심하게 감정해야 할 수준이 됐다.

2000년대▶이젠 '가짜 시장'과 '진짜 시장'이 따로 존재한다. 모방 제품에 대한 명품 제조사의 태도도 달라졌다. 가령 롤렉스 측은 모방 제품에 대한 단속 의뢰를 안 한다. 가짜에 대한 수요층을 진품에 대한 잠재 수요층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교한 가짜 때문에 피해를 보는 전당포도 생겨났다.

◆ 21세기 전당포

700만원짜리 양복 1억원짜리 시계…명품족이 주고객

*** 별의별 짝퉁

중국산 가짜는 B급 … 특A급은 어느 나라 제품 ?

전당포 주인의 '고민 1호'가 뭘까? 바로 '가짜와의 전쟁'이다. 서울 신촌의 전당포 '캐시파크'의 강승식(36) 지점장은 "가끔 전당포 사업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지만 '가짜 스트레스'에 대한 얘기만 해도 두 손을 내젓는다"고 말한다.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금돼지 사건도 터졌다. 사기꾼들은 납덩어리에다 금도금을 한 뒤 전당포 26곳에 맡겼다고 한다. 무게도 금과 똑같이 만들어서 말이다. 결국 1억원 이상의 수익을 챙기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전문가들도 속을 정도예요. 잘라보기 전에는 금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죠. 그렇다고 손님이 가져온 금제품에 무작정 톱을 들이대기도 어렵잖아요."

금뿐만 아니다. 명품 시계나 명품 가방도 마찬가지다. 롤렉스나 카르티에, 프랭크 뮐러, 피아제 등 명품 시계의 모조품에 탄성이 종종 터진다. "흔한 가짜는 척 보면 알아요.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손목만 슬쩍 봐도 시계가 진품인지 아닌지 알죠." 그런데 작정하고 만든 제품은 다르다. "한번은 수백만원짜리 스위스제 카르티에 시계를 가져왔더군요. 무게도, 촉감도, 케이스의 정교함도 진짜더군요. 돈을 내줄까 하다가 '혹시나'하는 생각에 뒷면 뚜껑을 열었죠. 그런데 부품에 '메이드 인 재팬'이 찍혀 있더라고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고 한다. 또 당할 뻔한 것이다. 전에는 금이 간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모르고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럼 가짜를 들고 온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열에 아홉은 대답이 똑같다. "선물 받은 거예요. 저도 몰랐어요." 그럼 그만이다. 그래서 강 지점장도 전략을 바꿨다. 가짜 명품을 들고 오면 일부러 '공부'를 한다. "가짜란 말은 안 해요. 대신 들고 가서 뚜껑도 따고 구석구석 살피죠. 요즘 가짜는 어떻게 생겼는지 공부할 절호의 기회거든요." 그런 다음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취급하지 않는 품목입니다." 그래도 손님이 "왜 안 되느냐"고 꼬치꼬치 따진다면 말한다. "진품이 아닙니다." 그들도 고객이기 때문이다.

가짜에도 등급이 있다. 중국산은 B급, 홍콩산은 A급, 대만산은 특A급이다. 어떤 가짜 제품은 전당포 주인들도 "야~아, 이거 정말 잘 만들었다"고 감탄할 만한 수준이다.

진짜와 가짜의 구별법을 가르치는 학원은 없다. "경기도 광주에서 전당포 하는 분은 아예 시계방에 가서 200만원의 수업료를 내고 '롤렉스 시계'를 배웠대요. 전당포끼리도 그런 구별법은 알려주지 않죠. 영업 비밀이니까요." 그래서 '당한 경험'은 커다란 재산이다.

*** 희한한 손님

골프채, 월요일엔 맡기고 금요일엔 찾아가고 …

전당포에는 희한한 문의가 많다. "250년 된 바이올린이 있다.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부터 "30년 된 인삼주는 얼마냐" "납골당 분양받은 게 있는데 맡아줄 수 있느냐"는 전화까지 걸려 온다. 대답은 물론 "노(NO)!"다.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삼주나 양주는 유질되더라도 물건을 처분할 수가 없다. 주류 판매는 아무나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당포에는 별별 물건이 다 있다. 요즘은 흔한 게 풀세트 골프백이다. 골프백을 통째로 맡겨 놓고 금요일 밤에 찾으러 오는 고객도 있다. "원금과 이자를 다 갚은 뒤 찾아가요. 그리고 월요일에 다시 맡기러 와요. 그리고 금요일 밤에 다시 찾아가죠." 강 지점장도 그 고객의 주말이 궁금하다. 그래도 사생활이라 묻진 못했다. 이 밖에도 방송용 카메라, 최신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 노트북 컴퓨터, 1000만원이 넘는 촬영용 조명기구 등 맡기는 물품의 종류는 숱하다.

그럼 이런 물건을 맡기면 과연 얼마나 받을까. 기준은 도매가다. 금과 은, 다이아몬드류의 귀금속을 맡긴다면 도매가의 80~90%를 대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휴대전화나 카메라 등 디지털 제품은 도매가의 60~70%밖에 못 받는다. 디지털 제품은 3개월만 지나도 구형이 되고, 값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출금의 이자도 맘대로 늘어나는 고무줄은 아니다. 법적 기준인 월 5.5%를 넘지 못한다. 가령 100만원을 대출하면 월 5만5000원의 이자를 갚으면 된다. 그래도 낮은 이율이 아니다. 1년이면 이자가 66만원으로 늘어난다.

장물도 큰 골칫거리다. 장물을 모르고 받았다간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다. "한번은 카르티에 시계를 맡았는데 안 찾아갔어요. 그래서 인터넷 판매 사이트에 올렸죠. 어떤 여자분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시계의 일련번호를 알려 달라고요. 가르쳐 줬더니 5분 뒤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죠." 알고 보니 장물이었다. 예식장에서 도둑맞은 예물 시계를 찾기 위해 신부는 석 달째 인터넷을 훑던 참이었다. 결국 경찰서에 가서 조서까지 써야 했다. 물건을 훔친 이는 다른 건으로 이미 철창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 후에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시계를 가져오면 "손목에 한번 차 보라"고 하고, 카메라는 "직접 한번 찍어 보라"고 한다. 작동법에 얼마나 익숙한지, 정말 자기 물건인지 보기 위해서다. 그래도 허점은 생긴다. 그래서 휴대전화나 카메라 등의 전자 제품은 아예 고객 센터에 전화해 분실 신고가 접수됐는지 확인한다.

*** 추억의 창살

'전통적' 전당포가 한창 주가 날리던 때는 ?

서울 서대문의 중앙사는 '그때 그 시절'의 전당포다. 허름한 건물 4층의 서너 평 남짓한 공간은 입구가 쇠창살로 막혀 있다. 안에는 여기서 25년째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는 최영배(57)씨가 앉아 있다. "쇠창살이 있어야 마음이 놓여. 아니면 누가 와서 어떤 짓을 할지 알아?" 그는 1970~80년대가 '전당포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그땐 찾는 사람이 많았어. 대학가가 아닌데도 손님의 20% 이상이 대학생이었어. 전자계산기나 시계를 들고 왔지. 1만5000원을 꾸면 대여섯 명이 술을 실컷 마셨으니까." 그땐 전당포에도 숙직만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밤에 금고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월 12만원이면 보안 업체가 맡아준다.

당시만 해도 전당포가 꽤 많았다. "아현동에서 무학재 고개까지 전당포가 8군데나 됐으니까. 지금은 이곳에 두 개밖에 안 남았어. 그나마 용돈 벌이만 하는 셈이지." 하루에 찾는 손님은 고작 2~3명. 나머지 시간은 TV를 보면서 소일한다. 여기선 명품을 받지 않는다. 위험 부담이 너무 높아서다.

'명품 전문'은 따로 있다. 청담동의 '캐시캐시' 본점은 100평이 넘는다. 2000년에 문을 연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진화한 전당포다. 쇠창살도 없다. 오히려 매장은 백화점 명품점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즐겨 입는다는 이탈리아제 브리오니 양복(시중가 700만원, 캐시캐시 판매가 350만원)을 비롯해 수천만원짜리 시계까지 명품이 즐비하다. 대부분이 위탁 판매다. '캐시캐시'는 중고 명품을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판매가의 15%)를 챙기는 식이다. "여기선 돈이 궁해 대출용으로 명품을 맡기는 사람은 10명 중 2~3명에 불과해요. 나머진 유행이 지난 명품을 '대신 팔아 달라'는 고객들이죠. 손님의 60% 이상이 여성입니다. 물건을 판 이들의 절반이 여기서 다시 물건을 사죠." 압구정동과 청담동 일대에만 명품 전당포가 30개쯤 된다.

"사실 40대 이상은 '이거 가짜야. 진짜 같지?'하며 이미테이션 제품을 자신 있게 들고 다니죠. 그런데 요즘 20~30대는 달라요. 인터넷에서 '명품 동호회' 등이 생기면서 이들도 명품의 진위를 가릴 수 있게 됐죠. 그래서 젊은 층은 중고라도 진짜라야 직성이 풀리는 수요층이 됐죠." '캐시캐시'의 중고 명품 가격은 백화점 매장가의 50~60% 선이다. 여기선 '가짜'도 안 통한다. 시계와 보석의 전문 감정사들이 상주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팔린 명품 중 최고가는 다이아몬드로 덮인 피아제 시계(시중가 1억원). 여기선 3500만원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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